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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6>농업경제학은 어떠한 성격의 학문인가?-②“이제부터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우농(愚農) 최양부

첫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아 한숨 돌리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누나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았다. 누나는 내가 집을 떠난 후 한 달여가 지난 62번째 생신날(1972.7.23) 가족들과 저녁을 드신 후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으나 공부에 지장을 주니 알리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로 곧바로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1972년 8월 중순 미주리대학교 농업경제학과에 등록하고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한 이후 1977년 8월 공부를 끝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5년간 나는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로지 강의실과 연구실, 도서관, 기숙사(후에 자취방), 식당과 카페를 오가며 청춘을 불태우는 삶을 살았다. 그동안 우리 농은 유신독재 속에서 새 역사를 만들었다. 1972년부터 통일벼 보급을 위한 강압적인 증산 농정 추진으로 1977년 마침내 주곡자급을 달성했다. 농가소득도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과 고미가 정책 덕분에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농촌은 1972년 이후 본격화된 새마을운동으로 환골탈태하며 구시대의 상징인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미주리대학에 등록을 마친 후 나는 박사과정 공부를 하는데 모든 것을 같이 상의하고 지도받아야 할 지도교수를 선임했다. 농업발전론 강의를 하고 후진국 생활경험이 있어 외국인 학생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평판이 좋은 멜빈 브레이스(Melvin G. Blase) 교수를 찾아뵙고 지도교수가 되어달라고 간청하여 그의 승낙을 받았다. 브레이스 교수와 상의하여 대학 관례에 따라 처음 2년간은 박사학위 과정 이수를 위한 전공필수과목 공부와 박사학위 자격시험을 마치고, 마지막 3년째에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과정을 3년 안에 모두 마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농업개발협회(The A/D/C)가 주는 장학금도 3년까지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 기간 안에 차질없이 모든 절차를 마쳐야 했다. 지도교수와 앞으로 일정에 합의하고 학점 따기 공부에 돌입했다. 특히 장학금을 받는 처지여서 학점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모든 학과목은 반드시 못해도 B 학점 이상 받아야 하는 전쟁과도 같은 유학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첫 학기를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아 한숨 돌리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누나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았다. 누나는 내가 집을 떠난 후 한 달여가 지난 62번째 생신날(1972.7.23) 가족들과 저녁을 드신 후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셨으나 공부에 지장을 주니 알리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로 곧바로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충격으로 할 말을 잃은 나는 평소 아버지가 좋아하신 가수 김상희의 ‘빨간 선인장’ 노랫말을 떠올리며 한없이 울었다. ‘마른 잎이 굴러도 찬바람이 불어와도/ 내 가슴은 언제나 따스한 임의 입김/ 앙상한 가지마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내 가슴은 언제나 따스한 임의 음성/ 혼자서 가는 길이 외롭고 괴로워도/ 눈물에 젖은 길이 자꾸만 흐려져도/ 앙상한 가지마다 눈보라가 몰아쳐도/ 빨간 선인장은 봄을 기다립니다.’ 그동안 애증으로 굳게 닫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에게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죄송스러운 마음이 눈물과 범벅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빨간 선인장처럼 아버지가 사모하셨던 ‘따스한 임’은 누구였고, 그토록 기다리셨던 ‘아버지의 봄’은 어떤 날이었을까? 식민과 분단과 전쟁과 갈등 시대를 헤쳐나가며 통일의 봄날을 꿈꾸고 ‘자유와 민주, 평등, 평화’의 나라를 그리다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미래는 모두 너희들 것이다...부지런히 실력을 길러 애국애족하는 건설적이고 사심 없는 일꾼이 되어주기 바란다”라고 하시던 당부와 격려의 말씀은 이제 아들과 손자에게 들려줘야 할 유훈(遺訓)이 되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 뵈면 “수고했다. 양부야. 네 노력의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라고 하신 1964년 대학입학 때 들었던 아버지의 칭찬을 다시 들을 수 있을까?

1973년 1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새 학기를 맞아 다시 학점 따기 전쟁에 나섰다. 그런데 수강 중인 거시경제학 과목에서 문제가 생겼다. 중간시험을 그르치는 바람에 자칫하면 C 학점을 받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박사과정 학생에게 C 학점은 치명적 결함이 될 수 있었다. 지도교수를 찾아가 이번 학기 수강을 취소하고 다음 학기에 다시 들으면 어떻겠는지 상의드렸다. 그는 이 과목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전공필수과목이어서 그렇게 하면 한 학기가 늦어진다며 B 학점을 목표로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해보라고 하셨다. 그날 이후 학기말 시험을 치를 때까지 나는 거시경제학책을 말 그대로 삶아 먹듯이 읽고 또 읽었다.

학기말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나에게 담당 교수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시험답안지를 내주었다. 답안지에 빨간 펜으로 쓴 ‘100 Excellent Exam(100점. 참 잘했음)’이란 글을 본 순간 나는 너무 기뻐 환호성을 지르며 단숨에 지도교수에게 달려가 답안지를 보여드렸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은 후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가 1973년 5월로 내 나이 28살의 청춘이었다. 지도교수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자네는 마음만 먹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다. 지도교수의 그 말씀 한마디는 1년 후 나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저지르게 했다. 지도교수 말씀대로 나는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철학 공부를 새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날 이후 1974년 6월까지 모든 과정을 계획대로 순조롭게 마쳤다. 박사과정 이수를 위한 필수과목 학점을 모두 따고, 박사학위 자격시험인 종합시험도 잘 치르고, 박사학위 마지막 과정인 학위논문 연구 제목과 연구계획도 세우고 학위논문 심사위원 선정까지 모두 끝마쳤다. 미국유학 2년 만에 처음으로 공부와 학점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그랜드 캐니언’을 보기 위해 일주일간 휴가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의 여행이 될지 여행을 떠나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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