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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7>전환시대의 경제 논리와 개방농정을 비판하다-⑧농민들은 농민운동에 눈뜨기 시작했으며 그 중심에는 ‘가농’이 있었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농민들은 새로운 자신감과 정신적 자각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익사회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경제적 이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정부와 농협의 무리한 정책이나 일방적인 사업추진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항의하고 저항하며 투쟁하는 농민운동에 눈뜨기 시작했으며 그 중심에는 한국가톨릭농민회(‘가농’)가 있었다.


1970년대 농민들의 새마을운동을 통한 ‘할 수 있다’ 정신의 함양과 다양한 단체활동 경험은 1970년대 후반 농경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도시산업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형성에 대응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농민들은 새로운 자신감과 정신적 자각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이익사회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경제적 이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정부와 농협의 무리한 정책이나 일방적인 사업추진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항의하고 저항하며 투쟁하는 농민운동에 눈뜨기 시작했으며 그 중심에는 한국가톨릭농민회(‘가농’)가 있었다.

1970~80년대 농민운동을 이끈 가농은 1964년 ‘한국가톨릭 노동청년회 농촌청년부’가 발족하면서 시작되었다. 1965년 전국조직(대표 이길재)을 구성하고 활동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1966년 10월 농촌청년부를 ‘한국가톨릭 농촌청년회’(회장 이길재)로 개편하고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재정지원으로 농민단체의 모습을 갖추었다. 1972년 4월 명칭도 한국가톨릭농민회로 바꾸고 전국적인 농민단체로서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가농은 출범 이후 농협 민주화운동과 농촌 신용협동조합 보급 운동을 시작으로 1974~75년 농지임대차실태조사, 1975년 쌀 생산비 조사를 추진했다. 1976년 천주교 주교회의는 가농을 교회 공식 단체로 인준했다. 11월에는 가농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전남 함평군에서 일어난다.

1976년 9월 함평군 농협은 고구마가격이 폭등하자 조합원 농민에게 ‘피땀 흘려 지은 농사 농협 통해 제값 받자’라며 고구마 생산을 독려했다. 농협은 말린 절단 고구마 대신 생고구마를 시세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전량수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수확기에 생산량이 증가하자 농협은 생산량의 40% 정도만 수매했다. 조합원은 나머지 고구마를 상인에게 헐값으로 팔거나 썩어서 폐기해야 했다. 조합원의 피해보상요구에 농협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11월 함평 가농 회원들은 ‘함평 고구마피해보상 대책위원회(위원장 서경원)’를 조직하고 회원들의 피해신고를 받았다. 농협의 회유와 압박에도 함평군 일대(4개 면 1개 읍 9개 마을)에서 160 농가가 309만 원의 피해액을 신고했다. 1977년 4월 가농은 광주 계림동성당에서 윤공희 광주 대주교의 주례로 가농 회원과 사제단 600여 명이 기도회를 열었다. 가농은 농민조합원의 이익 옹호에 앞장서야 할 농협이 조합원들의 피해보상 요구를 묵살하고 책임을 호도하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이자 완전한 피해보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사태가 커지자 농수산부와 농협중앙회는 합동조사를 통해 ‘함평군 농협이 전량수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라면서도 사건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사태는 오히려 악화한다.

1977년 8월 가농은 ‘농협문제세미나’를 개최하고 ‘함평 고구마 피해 농가 즉각 보상, 조합장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 철폐와 조합장 직선제실시, 부당한 출자 강요 즉각 중지 등 농협 민주화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가농은 1978년 전국대의원총회에서 함평 사건 해결을 위해 피해보상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4월 24일 광주 북동성당에서 윤공희 광주 대주교와 가농 지도신부단 공동집전으로 전국에서 모인 700여 명의 가농 회원과 신도가 참여한 대규모 농민기도회를 개최하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규탄시위를 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가농 회원들은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농협은 4월 29일 피해액 309만 원 전액을 보상했다. 그러나 ‘함평 고구마사건(1976-78)’과 농협 민주화를 주장한 ‘춘천 농민회사건(1977~79)’으로 구속 중인 가농 회원(정성헌, 유남선, 이상국, 조봉훈 등)의 석방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이 이어졌고 정부가 일부(이상국, 조봉훈)를 석방하면서 단식 8일째인 5월 2일 사건은 1년 6개월 만에 종료되었다. 이후 감사원은 1976~77년간 함평뿐만 아니라 전남·북과 경남·북 4개 지역농협이 주정 회사들과 결탁하여 고구마 수매자금 80억 원을 유용한 사실을 밝혀내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농협중앙회 도지부장, 단위조합장 등 농협 임직원 202명을 해임토록 하는 한편, 457명을 정직 또는 감봉, 견책 등의 징계 조치를 하게 함으로써 농협의 부패상을 세상에 알렸다.

함평 고구마사건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 이후 농민조합원들이 농협과 정부에 맞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킨 최초의 농민운동으로 관제농협의 반농민적 부패상을 세상에 알리고 ‘농협조합장 직선제실시 100만인 서명운동’ 등 농협 민주화운동을 시작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가농은 가톨릭 교계와 연대하여 농민 문제에 대해 사회여론을 조성하는 농민운동의 새로운 전형(典型)을 만들었다. 가농은 1978년 가뭄으로 발생한 신품종 ‘노풍 피해보상 운동’과 ‘농민 스스로 생산한 농산물에 가격을 매길 수 있어야 한다’라고 외치며 ‘쌀 생산비 보장 운동’을 펼쳤다. 1979년 농협과 정부가 공급한 불량 씨감자 피해보상을 요구한 ‘안동 농민회사건(일명 오원춘사건)’으로 가농에 대한 유신 독재정권의 탄압이 강화되자 가농은 가톨릭 교계와 민주화운동단체와 연대하여 투쟁했다. 1970-80년대 가농 운동의 중심에는 이길재, 오익선, 최병욱, 박재일, 서경원 등을 비롯하여 김준기, 이병철, 정성헌, 이상국, 유남선, 박명근, 권종대, 정재돈, 오원춘, 엄영애(무순) 이외에 수많은 이름 없는 농민운동가들이 있었다. 가농은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 때까지 1970~80년대 우리나라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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