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이론 중시의 경제학자들은 신고전 경제학의 미시경제이론도 모른 채 농촌현장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농가경영실태조사 등을 통해 경험적 실증자료의 수집과 분석에 열중하고 있는 농업경제학자들을 ‘사실수집가(factologist)’라고 비꼬았다.


1974년 7월 그랜드 캐니언 여행길에서 영감을 받아 농업경제학이란 학문의 영혼을 찾아 나선 나는 농업경제학과 경제학의 방법론, 과학철학과 사회과학철학, 인식론 등의 철학 세계를 넘나들며 학문의 선배들이 쓴 문헌 조사에 나섰다. 농업경제학과 경제학의 학문적 기원과 발달의 역사, 연구방법론 논쟁, 경제이론의 인식론적 성격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과 그들의 생각들을 읽으면서 내 사고의 깊이를 키우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생각의 바다’를 떠돌았고 차츰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의 심연(深淵)’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농업경제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농경제학과가 창설되고 1957년 한국농업경제학회가 창립된 이후부터다. 그러나 농업경제연구의 뿌리는 1930년대 일제와 식민지주의 수탈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사는 농민 문제에 관심을 가진 학도들이 생겨나고 농민들의 실상을 증언하는 학문적 연구 논문과 책들이 나오면서부터였다. 해방 이후에는 일제가 남긴 식민지 소작제도 청산을 위한 농지개혁, 협동조합육성, 절량(絶糧) 농가 문제 등등 농민·농업·농촌문제가 국가적 화두가 되어 농정을 담당할 인재양성을 위한 농경제학 교육과 연구가 강화되면서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1950~1960년대 농업경제학계를 이끌었던 학자들로 김준보, 김문식, 정남규, 김동희, 박진환을 비롯하여 구재서, 이필규, 문정창, 박기혁, 주종환, 박동묘, 김복경, 채관식, 유인호, 박근창, 유종완, 최주철, 한규수, 최재율 교수 등이 있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일본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공부한 정치경제학자, 또는 경제사학자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정부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농업경제학을 ‘농민을 선동하는 불순한 학문’으로 취급하고 농업경제학과 신설을 억제하거나, 아니면 학과 명칭을 ‘농업경영학과’로 하도록 강요했을 정도였다. 1950년 6.25 전쟁 이후 마르크스경제학이 금기시되고 미국 유학생들이 생겨나면서 농업경제학은 빠르게 미국의 농업경제학과 경제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19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농업경제학이란 학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불어 닥친 농업공황으로 고통받는 농민을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관심이 생겨나면서 1903년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과 헨리 테일러(Henry C. Taylor) 교수의 농업경제학 강의를 시작으로 농업경제학이란 학문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에서 농업경제학을 개척한 학자들은 농과대학에서 농학 또는 반주류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학문을 ‘농장경제학(farm economics)’이라 칭하고 1919년 ‘미국농장경제학회’를 설립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농업경제학 창설을 이끌었던 선각자들은, 시대와 장소는 달랐지만, 대체로 농민이 겪고 있는 시대적 아픔을 공유하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실천적 해결 방안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역사적 존재이며 사회적 약자인 농민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겪는 제도와 정책의 불합리로 일어나는 경제적 불이익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아 현장을 발로 뛰었다. 그들은 농가소득증대를 위한 농장경영혁신과 농민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정책과 제도 개선방안을 찾는 등 실천적 문제해결연구에 열정을 바쳤다. 1930-1940년대 미국의 농업(장)경제학은 농민(가)을 돕는 유용한 학문으로 인정받았으며 주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주립대학 농과대학에 학과 설립 붐이 일어나면서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주립대학 농업경제학에 연구비가 많아지고 교수수요가 급증하자 일반경제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대거 농업경제학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농업’보다 ‘경제학’을 중시하는 학문적 기원도 관심도 생각이 다른 신고전 경제학을 공부한 경제학자들이었다. 농업경제학과에 ‘농업을 모르는 경제학자’들이 늘어나면서 교수들 사이에 전통적 현장 중시와 새로운 이론 중시의 연구방법론을 둘러싼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론 중시의 경제학자들은 신고전 경제학의 미시경제이론도 모른 채 농촌현장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농장(가) 경영실태조사 등을 통해 경험적 실증자료의 수집과 분석에 열중하고 있는 농업(장)경제학자들을 ‘사실수집가(factologist)’라고 비꼬았다. 특히 시카고대학교의 테어도르 슐츠 (Theodore W. Schultz)와 얼 헤디( Earl O. Heady) (‘슐츠-헤디’)교수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1930-1940년대 농업(장)경제학자들이 농업경제학을 경제학으로부터 분리된 독립된 학문영역으로 생각하고 독자적인 이론을 추구하는 것을 ‘학문적 미성숙’이라고 비판했다. 경제이론은 현실분석을 위한 ‘도구상자(tool box)’일 뿐이며 경제학은 이론이란 도구를 만드는 학문이고, 농업경제학은 만들어진 도구를 가져다 쓰는 경제학의 응용분과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제이론은 ‘선험적(a priori)으로 자명한 진리’이며 법칙이고 공리이기 때문에 이론의 가르침에 따라 현장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고 현장을 뛰기 전에 경제이론부터 배우라고 했다.

1950-1960년대 농업경제학자들은 ‘농업경제학자 이전에 경제학자’라는 새로운 주장에 심리적 혼란에 빠지며 ‘정체성 위기’를 겪게 되었고 차츰 신고전 경제이론을 농업경제이론으로 수용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면서 자신을 응용경제학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학회 이름도 ‘농장경제학에서 ‘농업경제학(agricultural economics)’으로 바꾸었다. 마침내 전통적인 농업(장)경제학은 죽었다는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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