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ㆍ독자투고
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8>산업사회의 새 농정을 설계하다-⑰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자타공인 대한민국의 농정연구중심이 되었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학위를 마친 인재들이 속속 연구원에 합류하면서 연구원은 그야말로 농경제사회분야 인재풀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학 등으로 교수요원을 보내고 학회를 이끄는 영향력을 가진 거점연구기관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농정연구중심이 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4년 3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김보현 원장이 재임 6년 만에 퇴임하고 김영진 부원장이 원장에. 성배영 연구위원이 부원장에 취임했다. 4월에는 허신행 수석연구원이, 나는 군 미필과 후배라는 이유로 3개월 늦은 7월에 각각 연구위원이 되었다. 김보현 원장 뒤를 이은 농수산부 차관보 출신인 김영진 원장의 취임을 쳐다보는 마음이 무거웠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장이 농경제사회학에 대한 학문적 수련이나 연구업적, 학계의 신임, 평판 등과는 무관하게 청와대나 농수산부 등 정부 실력자들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관행이 불편했다. 특히 그 자리는 개원 당시 원장으로 내정된 김동희 박사를 부원장으로 밀어낸 김보현 원장이 3년 단임의 약속을 깨고 연임하는 바람에 결국 연구원을 떠난 김동희 부원장의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 김 원장의 취임을 마음으로부터 축하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의 속내를 읽었는지 김 원장은 어느 날 나에게 “최 박사는 다 좋은데 여세(與世)를 할 줄 모른단 말이야!”라고 했다. 아직도 그때 그의 그 말이 귓가를 맴돈다.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가 여세도 잘해야 하는가?’ 나는 묻고 물었다. 나는 실사구시 하는 연구자가 되겠다는 초심을 떠올리며 ‘나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을 작정했다. 김보현, 김영진 원장선임은 원장 하고 싶으면 정부 실력자들을 찾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나쁜 선례를 연구원에 남겼다.

1978년 4월 연구원 출범 이후 6년이 흐르는 사이 수많은 연구자가 연구원에 새로 합류하거나 연구원을 떠나 대학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동희 부원장을 비롯한 오호성, 김영식, 주용재, 김동민, 구천서 등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고, 김성호, 강정일, 이정환, 이중웅, 서종혁, 이재옥, 박성쾌, 유철호, 윤호섭, 명광식 등등 학위를 마친 인재들이 속속 연구원에 합류하면서 연구원은 그야말로 농경제사회분야 인재풀(pool)을 가지게 되었으며 대학 등으로 교수요원을 보내고 학회를 이끄는 영향력을 가진 거점연구기관이 되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의 농정연구중심이 되었으며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8년 연구원 발족으로 해체된 국립농업경제연구소의 마지막 소장을 지냈던 김성호 연구위원이 농수산부 농지국장을 거쳐 주아르헨티나 농무관을 지낸 후 1983년부터 연구원에 합류했다. 그는 1982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이란 삼국사기 등 한일고대사를 재해석한 역사책을 출간하면서 역사학자로 변신한 후 1984년부터 우리나라 농정사 연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 ‘농지개혁사연구’(전경식, 장상환, 박석두)를 비롯하여 1986년부터는 ‘농정 40년사 편찬’사업(김운근, 허영구)을 추진했다. 김 위원의 연구원 복귀로 허신행 위원과 같이 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단체인 농사단(NSD)을 인연으로 만난 세 사람이 농촌진흥청 농업경영연구소를 거처 연구원에서 다시 만나 연구위원으로 같이 일하게 된 것은 숙명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김 위원의 연구원 복귀로 나는 연구원 생활이나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마음 편하게 그에게 자문하곤 했다. 김 위원은 나에게는 선배이자 스승이고 큰 형님 같은 존재였다.

연구원은 출범 6년이 지나면서 다양한 사람들로 새로운 생각들이 넘쳐나고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연구업적을 쌓아가고 있었다. 김영식, 현공남, 이정용, 이영만 등은 농업부문 정책연구로 농어촌경제사회개발 장기전망과 농업개발전략, 농업구조개선, 농업기계화 연구 등을 추진했다. 김영식이 대학으로 떠난 후 이정환 등에 의해 농업부문 총량지표 분석모형 개발과 정책실험연구, 강정일 등에 의한 농업자재와 농기계 연구가 전문화되었다. 오호성, 김정부, 이광원 등이 추진했던 자원경제분야의 농지 제도, 에너지, 산지 이용과 개발 등의 연구도 오호성이 떠난 후 김영진, 김성호에 의한 농지임대차 연구로, 이광원에 의한 산림연구로 심화 되었다. 주용재, 유남식, 김기성, 김진수, 윤석원, 김충실, 이영기 등이 추진한 식품수급표 작성, 식량 수급과 관리, 양특적자 등에 관한 연구는 명광식, 윤호섭, 김명환, 박동규 등에 의해, 생산경제분야는 이중웅, 이두순, 김종숙, 최경환 등에 의해 전문화되고 있었다. 성배영은 1980년 5월 말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농수산분과 전문위원으로 발탁되어 활동했으며, 허길행, 김정기 등과 함께 서울시(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건립계획을 수립하고 1985년 6월 19일 시장 개장에 큰 역할을 하고 전국 지방 도매시장 건설 구상 등 우리나라 농수산물시장유통 발전에 많은 연구업적을 쌓고 있었다. 허신행은 전창곤, 최정섭, 황연수, 이은우 등과 매월 농수산부 장관에게 ‘월례 농어촌경제동향보고’를 하며 농산물가격정책과 농업관측, 물가지수, 복합영농, 축산정책 등을 연구했으며, 축산분야는 차츰 김형화, 유철호 이철현 등에 의해 전문화되었다. 농촌사회분야 연구는 황인정, 김동일, 윤여덕, 민상기, 유철인 등이 기여했다.

나는 이용만, 서종혁, 김형모, 박수일, 김수욱 정기환, 정철모, 강병주, 이동필, 박성재, 오내원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연구자들과 같이 농외소득과 농촌공업개발, 농촌정주생활권과 농촌지역종합개발, 농가유형론, 산업사회 농정론 등 새로운 정책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1985년 9월부터는 농어촌지역종합개발연구단장을 맡았다. 나는 사회학, 지리학, 행정학, 정책학 등을 넘나들며 농업경제학의 경계를 허무는 요즘 말하는 ‘통섭(統攝)과 융합’의 새길을 걷고 있었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농어민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관련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