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농민들은 행정기관의 독려와 강요로 조합원이 되었고, 출자금도 자발적이 아니라 추곡수매시 정부의 강압으로 강제출자 했기 때문에 “내가 만든 나의 조합”이란 조합원으로서 농협에 대한 적극적인 주인의식이 부족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시작된 최초의 농업협동조합(현재 ‘농협’의 전신) 설립 작업은 시작부터 저항에 부딪쳤다. 1948년부터 시작된 설립 작업은 9년만인 1957년에서야 마침내 이루어졌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다. 

1948년 10월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은 ‘농업협동조합 조직요강과 농업협동조합법안’을 만들어 국무회의에 상정했으나 재무부 반대로 유보되었다. 이후 1956년까지 8년간 농림부는 거의 매년 농협법 입법화를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재무부와 대립하며 진척을 보지 못했다. 쟁점의 핵심은 금융조합과 연합회의 금융(신용)과 일반(경제) 업무를 분리하여 별도의 기관을 만들 것인가와 업무 인수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 문제였다. 농림부는 ‘신경분리’에 반대하며 농협이 신경업무 모두를 인수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재무부는 농업은행을 별도로 설립하여 금융업무를 분리 인수하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쟁점이 된 금융조합은 1907년 대한제국의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精太郞)가 독일식 라이파이센 신용협동조합을 모방하여 만든 ‘지방금융조합규칙’에 따라 영세 농민을 대상으로 농업자금 융자와 곡물보관창고, 영농자재판매 등의 사업을 협동조합방식으로 하는 ‘지방금융조합’을 군 단위 지역에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지방금융조합령’을 제정하여 조합장은 총회에서 선임하되 지방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이사는 총독이 임명하도록 고쳐 조합을 관제화 시켰다. 1918년 총독부는 명칭을 ‘금융조합’으로 개칭하고 도시에도 조합을 설립하여 농민과 상공인을 위한 금융전담기구로 만들었다. 1933년에는 금융조합을 회원조합으로 하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를 설립했다. 
1926년 구·판매사업 등 경제 사업을 하는 산업조합을 설립하여 농어민을 위한 경제업무를 강화하면서 호응을 얻자 금융조합의 요청에 따라 총독부는 1935년 ‘식산계령’을 공포하고 금융조합도 조합 당 4~5개 부락을 선정 ‘식산계’를 조직하여 구·판매 등 경제업무를 활성화 시켰다. 이 때문에 금융조합이 산업조합과 충돌하자 총독부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산업조합을 폐지 해산시켰다. 

금융조합 업무분할여부로 고심하던 이승만 정부는 주한미국경제조정관실의 초청으로 1956년 2월 방한한 세계협동조합연맹 (ICA)의 협동조합전문가 J. 쿠퍼가 건의한 금융조합을 농업은행과 신용협동조합, 농업협동조합의 3개 기관으로 분리 설립하는 방안 (‘쿠퍼 안’)을 수정하여 1957년 2월 14일 농협법과 농업은행법을 제정공포하고, 농협과 농업은행을 분리 설립했다. 당초 재무부 주장대로 되었다. 농업은행은 금융조합과 연합회의 금융업무 일체를 인수하고, 농협은 금융 업무를 제외한 구·판매사업 등 경제업무와 식산계를 인수했다. 특히 농협의 경우 금융조합의 식산계는 이동조합이, 시군 금융조합의 금융업무를 제외한 일반 업무와 시군농회는 시군조합이, 금융조합연합회의 일반 업무와 대한농회, 시도농회는 농협중앙회가 인수하도록 했다.   

1958년 4월 1일 재무부의 출연과 감독을 받는 농업은행은 농업정책금융을 전담하는 특수은행으로 은행 업무를 개시했다. 농림부는 1957년 4월부터 행정구역에 따라 이동조합-시군구조합-중앙회의 3단계 농협, 또는 축산, 원예 등은 특수조합-중앙회의 2단계 농협 설립에 착수했다. 1년 가까운 설립 작업 끝에 1958년 3월 말까지 농림부는 이동조합 6626개, 시군구조합 53개, 원예조합 32개, 축산조합 41개, 특수조합 5개를 설립하는데 그쳤다. 1958년 5월 10일 조합장들은 농협중앙회 창립총회 개최하고 농림부 요청으로 3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서울축협조합장 공진항을 중앙회장에 선출했다.

그러나 농협은 금융조합과 식산계, 심지어 조선농회까지 인수하면서 총독부의 농민수탈농정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시군농협이나 중앙회의 임직원으로 채용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은 농업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식산계원에서 조합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을 뿐이었고, 그들에게 농협은 여전히 총독부의 금융조합이나 식산계가 간판을 바꾼 관제조합 또는 정부사업 대행기관에 불과했다. 특히 농민들은 행정기관의 독려와 강요로 조합원이 되었고, 출자금도 자발적이 아니라 추곡수매시 정부의 강압으로 강제출자 했기 때문에 “내가 만든 나의 조합”이란 조합원으로서 농협에 대한 적극적인 주인의식이 부족하게 되었다. 또한 식민지 수탈정책에 앞장서다 농협의 고위직 또는 일반직원이 된 사람들은 협동조합의 정신과 원칙에 따라  조합원에게 봉사한다는 생각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농협에는 출발부터 조합원들의 무관심 속에 조합장과 임직원들이 조합을 차지하여 조합원 위에 군림하고, 중앙회장과 임직원들이 회원조합위에 군림하는 비민주적이고 반 협동조합적인 잘못된 관료주의 풍토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농업은행과 농협의 ‘갑을갈등’이었다. 당시 농업은행법 1조는 “농업은행은 농업신용제도를 확립함으로서 농업협동조합의 발전, 농촌경제의 부흥과 농민의 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농협은 자체자금도 없고 수입원도 확보하지 못해 직원 봉급주기마저 어려운 상태에서 ‘을’이 되었고, 농업정책금융을 전담하는 ‘갑’이 된 농업은행으로부터 융자대출을 받고 채권관리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농협과 농업은행 간의 갑을
갈등은 결국 ‘농협·농업은행 통합론’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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