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나는 자가 농지와 가족 노동, 자연에 의존하여 생계와 판매를 동시에 생각하며 ‘절대 생산량 극대화’를 추구하는 소농적 가족 농가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경제로 간주하거나 의제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현실 왜곡이며 가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1978년 4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둥지를 틀고 직업으로서 농정연구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정책으로서 농정은 무엇이고 정책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연구방법론을 정립(正立)하는 일은 내가 넘어야 할 높은 산이었다. 농정연구는 나의 천직이고 나의 책임이자 의무가 되었다. 더욱이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적지 않은 월급을 주고 농정연구에만 전념하라는 것은 우리 농민과 농업·농촌 발전에 도움을 주고 나라발전과 국리민복에도 도움이 되는 정책연구를 하라는 지상명령 아닌가!. 나는 어떻게 명령을 잘 수행할지를 고민했다.

우리 농(민·업·촌)의 발전을 위한 농정연구자는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회과학도로서 과학성과 객관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농의 발전을 위한 공익증진에 봉사해야 한다. 그리고 농정의 개발과 건의, 비판과 평가, 선택과 결정 과정에서 농에 실질적인 유익을 주는 실천적이고 생산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론(사실)-정책(판단) 이원론’에 따라 정책의 선택과 제안을 위한 규범적 판단기준도 분명히 확립해야 한다. ‘농정의 본질과 농정연구방법’에 대한 철학적 입장의 정립이 시급했다.
농정은 일반 정책과 마찬가지로 ‘농(農)이 당면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바람직한 발전목표달성을 위해 정부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행동계획이며 실천방안’이다. 정책으로서 농정은 구조적으로 농이 직면한 현실 문제를 바람직한 발전의 미래상의 관점에서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 재정적, 제도적 실천계획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책(농정)연구는 근본적으로 현상의 변화를 위한 구상이고 계획을 세우는 설계작업이다. 정책(농정)연구는 대상이 되는 다양한 사회(농)의 문제들 가운데서 국가적, 사회적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선택하고, 선택된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는 이론연구와 문제해결 방안을 찾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설계하는 실천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정책연구는 연구해야 할 정책문제를 선택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 가운데서 가장 바람직한 최선 혹은 차선의 방안을 선택하고 건의하는, 연속적인 선택의 과정이며, 연속적인 규범적, 또는 처방적 가치 판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농정연구를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우리 농의 사회경제적 현실에 기초하여 농가가 어떤 기준으로 생산과 소비, 가족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선택하고 결정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나 미국적 응용경제학을 공부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일반경제학 이론, 특히 신고전 미시경제학의 시장, 가격, 기업이론을 농업경제이론으로 ‘간주(看做)’하고 우리 농가와 농업 현실에 적용한다. 농가경제를 기업경제로, 농업생산을 이윤 활동으로, 농산물시장을 완전경쟁으로 ‘의제(擬制)’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나는 ‘간주와 의제의 방법’은 비과학적이고 학문적 비판 정신을 저버린 연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신고전 경제이론도 때와 장소를 초월한 불변의 경제법칙이 아닌 도입경제이론일 뿐이며 우리 농의 역사적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실증적인 검증과 비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가 농지와 가족 노동, 자연에 의존하여 생계와 판매를 동시에 생각하며 ‘절대 생산량 극대화’를 추구하는 소농적 가족 농가를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경제로 간주하거나 의제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현실 왜곡이며 잘못된 가치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농정연구도 도입이론의 응용단계를 넘어서 우리 농가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농가에 대한 이론적 틀을 확립하고 농민의 삶의 조건과 질의 개선에 도움을 주는 정책방안을 제시하는 실사구시적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급격한 산업화와 시장경제화, 개방화의 충격으로 해체당하고 있는 전통적인 소농적 가족 농가의 변화실태를 파악하고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한 우리 실정에 맞는 농정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정연구를 위한 두 번째 과제는 ‘이론-정책 이원론’의 입장에 따라 농정문제와 바람직한 농정 대안의 선택과 제안을 위한 규범적 선택기준을 정립하는 일이다. 농가들이 급격한 산업화와 개방화의 충격을 받고 시장경제에 내몰리면서 저임금 유지를 위한 저 농산물가격 정책과 증가하는 영농비로 인한 ‘가격-비용 이중압박(price-cost double squeeze)’과 기술혁신으로 영농비 증가에도 증산으로 오히려 시장가격이 하락하여 농가를 더욱 옥죄는 ‘기술혁신 쳇바퀴효과(technological treadmill)’로 고통받는 농가가 처한 구조적으로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거래를 바로잡는 일이 시급했다.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더 나은 농의 내일을 위한 발전의 미래상에 대한 창조적 상상력도 필요했다. 나는 농가 경제에 작용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선택을 위한 가치 판단기준으로 농민권익 보호와 농의 가치창달을 우선시하는 ‘인도적 농민주의(humanitarian agrarianism)’라고 부를 수 있는 윤리적 가치 규범의 확립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농정연구를 위해서는 학문적 과학성(객관성)과 함께 농민 우호적이고 농업·농촌발전 지향적인 정책을 선호하는 가치선택은 피할 수 없으며, 이는 과학적 농정연구를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 결단이라 생각하며 나는 바람직한 농정연구방법론을 정립했다. 그때가 대체로 1982년경(37세)으로 나는 마침내 농정연구자로 이립(而立)하고 자유롭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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