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개방농정으로 인한 농민들의 일방적인 희생은 고스란히 농가 부채누적으로 이어졌다. 날로 심화하는 도시·농촌 간 상대적 소득 및 발전격차로 젊은 세대들은 농촌을 등지고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지고 그들의 저항은 날로 거세어지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1984년을 전후한 5년간(1981~85) 나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농(農)에 희망을 주는 새 농정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으로 불타는 열정과 격정의 시대를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대는 우리가 피할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질풍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문명의 대전환 시대’였다. 1980년대 한국 사회가 1960~70년대 압축성장으로 전통적인 농업·농촌·농민 중심의 농경사회가 해체되고 상공업·도시·노동자 중심의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는 변화의 새 바람을 직시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휘몰아치는 산업화(도시화, 공업화, 시장경제화, 개방화, 민주화 등)라는 거대한 태풍의 충격으로 농업, 농촌이 붕괴하고 무너지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농민들의 ‘절망과 분노의 들판’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 농을 온몸으로 느끼고 아파하며 ‘산업사회와 농의 현재와 장래’에 대해 천착(穿鑿)했다.

1978년 벼 노풍과 가뭄 피해, 고추 파동, 1980년 사상 초유의 전국규모의 냉해로 인한 벼의 ‘대흉작’과 1981년의 외미(外米) 과다 도입과 쌀값 폭락, 외국농산물수입으로 인한 농산물가격하락, 1983년 양곡특별회계적자 해소를 위한 정부 쌀 수매가 인상 동결 등으로 농가는 급격하게 늘어난 부채에 시달리고 농촌경제는 불황의 늪에 빠졌다. 1980년 냉해 피해에 대한 적절한 국가적 보상 없이 추진된 개방농정으로 인한 농민들의 일방적인 희생은 고스란히 농가 부채누적으로 이어졌다. 날로 심화하는 도시·농촌 간 상대적 소득 및 발전격차로 젊은 세대들은 농촌을 등지고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커지고 그들의 저항은 날로 거세어지고 있었다.

1981년 가을 당시 농민운동을 이끌고 있던 가톨릭농민회(‘가농’)는 추수감사제 및 농민대회를 지역별로 개최하고 다음과 같은 6개 항의 결의사항을 채택하고 ‘농업정책에 대한 우리의 주장’을 발표했다. 가농은 “1) 농산물가격 결정권을 갖자, 2) 우리의 땅을 지키자, 3) 외국 농산물수입을 막자, 4) 농협의 주인 자리를 차지하자, 5) 농지세, 수세를 비롯한 각종 불공평한 조세 공과금을 바로잡자, 5) 각종 공해를 막자, 6) 지방자치제가 실시 되도록 하자”(가톨릭농민회 50년사 I: 1966~2016 생명과 해방의 공동체, 가톨릭농민회, 2017:196) 등 6개 항의 1980년대 농민운동의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그리고 가농은 외국농산물수입개방에 반대하는 한편 농업협동조합의 조합원 강제 출자, 농지개량조합비(일명 ‘수세(水稅)’) 강제징수, 갑·을류 농지세 부당과세 등에 대한 시정요구, 신품종 재배 강요 등 정부의 ‘강제농정’에 저항하며 농민의 권익쟁취에 나섰다. 1983년 8월 1일부터는 ‘농협 조합장 직선제실시 100만 서명운동’을 전개했으며, 정부의 쌀값 수매가 동결조치에 항의하며 가격보장과 전량수매 운동을 펼쳤다. 1984~85년간에는 소값 폭락에 따른 피해보상 운동으로 ‘소몰이 시위’을 하고, 외국농산물수입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의 대흉작을 비롯한 자연재해와 농정실패로 전두환 정부의 김재익 수석이 추진하는 개방농정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과 함께 정치권의 비판이 거세지던 1983년 10월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 국가 영웅 아웅산의 묘소를 참배하기 직전 북한 공작원에 의한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경제부총리를 비롯하여 1980년 이후 전두환 정권 4년의 경제정책을 이끌며 ‘경제 대통령’이란 별칭까지 얻은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등 17명의 장·차관급 수행원이 순직했다.

김 수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그가 추진해온 개방농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수석 후임에는 사공일 산업연구원장이 임명되었다. 사공일 수석은 1987년 말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할 무렵까지 거의 4년여간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이끌었다. 그는 이상주의적이고 다소 급진적인 김 수석보다 현실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사공일 수석은 농업정책도 전체 국민경제적인 측면과 보조를 맞추어야 하지만 안보를 위한 식량 자급 등 정치 경제적 요소 등도 충분히 고려하는 현실적인 접근을 강조했다. 그는 취임 이후 개방농정에 대한 정치권과 농민의 저항 등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새로운 농정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36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김 수석이 추진했던 농산물시장개방정책은 새로운 농업개방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1986년 7월 한미 통상협상 타결과 1989년 GATT 등 국제적 통상압력에 의한 농산물시장개방, 1993년 12월 UR(우루과이 라운드)협상 타결과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 출범, 2004년 이후 FTA 협정 등에 의한 우리 농산물시장의 전면개방으로 이어진 역사를 생각하면 그는 시대를 앞서갔던 이상주의적 행정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개방농정이 우리 농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그 정책 때문에 우리 농은 일찍부터 새로운 경제사회환경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농정 찾기에 고심하며 면역력을 키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김 수석과는 1979년 4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초청세미나에서 그의 개방농정에 대한 비판으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의 개방농정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비판했던 사람이 6년 후인 1985년경에는 산업화와 개방화에 대응한 새로운 ‘산업사회 농정론’을 주창(主唱)하게 된 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뒤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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