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농 과 농대생에 대한 재인식’으로 이어지면서 시대가 바뀐 만큼 농에 대한 인식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농학도들의 ‘농촌 귀의’도 농학도 자신의 ‘농민화’가 되어야 하며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가적이고 사업가적인 투신을 강조했다. 농민들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문제해결에 스스로 나설 수 있도록 농민들의 주체역량을 키우는 농민교육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1967년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이 시작되면서 1차 계획(1962-66)의 성공적 추진으로 도시화-공업화, 산업화의 탄력을 받은 한국경제는 농업·농촌·농민을 경제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어내고 공업·도시·노동자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기 시작했다.

농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4년 46.8%에서 1967년 30.6%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1967년을 최고 정점으로 농가 인구는 1967년 1600만 명에서 1970년에는 1442만 명으로 10% 정도 감소하였고, 농가 호수는 259만 호에서 248만 호로 4.2% 감소했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은 도시·공업부문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으며 이들의 생계 안정을 위한 저곡가유지는 더욱더 농가 인구의 탈농이촌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해체되고 있는 농업과 농촌을 어떻게 산업사회와 시장경제에 적응하도록 ‘근대화’시킬 것인가가 우리 농의 새로운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도시·농촌 간의 소득 격차로 ‘농업근대화가 조국 근대화의 지름길’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농민의 불만은 커지고 있었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 농림수산부문의 성장으로 농가 생활 수준이 1950년대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향상되었음에도 도·농간 상대적 소득 격차로 인한 농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전체농가의 73.6% (183만여 호)를 차지하고 있는 1.0ha 미만 영세 농가들은 농사로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농가 계층 간 소득 격차 해소를 위한 농업구조개선은 농정이 해결해야 새로운 농정과제가 되었다. 그동안 ‘기업농이다 협업농이다’ 하며 농업구조논쟁을 했지만 결국 정부는 영세 농가를 ‘자립 안정 농가’로 육성하면서 식량 증산과 농가소득증대 특별사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했다.

1967년 5월 3일로 예정된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광주(광역시)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윤보선 야당 후보가 제기한 ‘호남홀대론’ 에 맞서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각 군에 적어도 한 개의 농산물 가공공장을 지어 여러분 자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여러분이 생산한 농산물을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농공병진정책을 공약했다. 재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농공병진 전담기관으로 ‘농어촌개발공사(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를 그해 12월 1일 창립하고 12월 28일 장관 회의에서는 농공병진을 ‘지방에서 나는 농산물을 가공 처리하여 공업 제품화하고 국내시장에 팔거나 해외시장에 수출해서 공업도 발전시키고 그와 관련된 원료를 생산하는 농어민 소득도 올려서 농업과 공업이 함께 발전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50년 전에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농업의 6차 산업화’를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1968년부터 원료농산물 생산을 위한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농특사업’)의 추진에 나섰다.

그러나 쌀·보리 중심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의 소득증대에는 한계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8년부터 정부 쌀 수매가를 전년 대비 17% 인상하고 이후 1971년까지 매년 평균 25.1%씩 인상하는 고미가 정책을 추진하고, 1969년부터는 쌀과 보리의 정부 수매가격을 높이고 시장판매가격을 낮추는 이중곡가제도 도입하면서 쌀을 정치 상품화하고 농업을 쌀 중심 경제로 더욱 고착시켰다. 이때 발생하는 양곡관리특별회계의 적자(‘양특적자’)를 한국은행 차입금으로 메꾸면서 재정인플레이션이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경제기획원은 3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1972년을 전후로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을 동원하여 이중곡가제 폐지를 주장했으나 1972년 9월 벼 베기 대회에 참석한 박 대통령이 ‘고미가 정책은 계속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면서 1977년 제4차 계획(1977-81)의 시작과 함께 기획원이 경제정책 기조를 고도성장에서 ‘경제 안정화’로 전환할 때까지 계속 시행되었다.

1966년 서울대 농대 창립 60주년을 맞은 수원 캠퍼스는 농업·농촌근대화의 방향과 농대생의 역할과 진로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일었다. ‘농민의 빈곤 위에 구축된 도시의 번영과 사치를 배격하고 말 없는 농민의 의사를 대변한다’는 농대생들의 사명감이 자칫 허숭(이광수의 소설 ‘흙’의 주인공) 등으로 상징되는 계몽적이고 감상적인 농촌 투신이 되고, 불쌍한 농민이란 값싼 동정론에 빠져 농촌봉사 활동에만 치중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농대생의 낭만적인 엘리트의식이라는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1967년이 되면서 논의는 ‘농(農)과 농대생에 대한 재인식’으로 이어지면서 시대가 바뀐 만큼 농에 대한 인식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농학도들의 ‘농촌 귀의(歸依)’도 농학도 자신의 ‘농민화(農民化)’가 되어야 하며 생산, 기계, 화학, 가공, 경영과 작물, 원예, 축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전문가적이고 사업가적인 투신을 강조했다. 또한 농촌(민)운동은 농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익과 권익향상을 위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운동이 되어야 하며, 다만 사회경제적 약자인 농민들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문제해결에 스스로 나설 수 있도록 농민들의 주체역량을 키우는 농민교육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농민 입장 대변을 위한 농학도의 역할로 농업·농촌 산골 마을 청년 정책농민 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한 정책 개발과 건의,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적극적인 농업행정과 농정참여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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