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 최양부

던켈 (Arthur Dunkel) GATT 사무총장은 UR 농업협상의 진척을 위해서 자신이 직접 UR 농업협상위원회 의장이 되어 UR 농업협정문 작성을 주도했다. 던켈 총장 주재로 1991년 2월 26일 38개국 농업협상위원회 첫 번째 회의가 열렸다. 던켈 총장은 UR 농업협정문을 완성할 때까지 앞으로 매월 한 차례씩 38개국 회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나는 대한민국 농민과 농업을 대표하여 매월 서울과 제네바를 오가는 힘겨운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38개국 회의를 위해 조일호 (국제농업통상협력관), 천중인(주 제네바 농무관, 후에 국제농업통상협력관 부임), 최용규(국제협력과장, 후에 주 제네바 농무관 부임), 김종진(주 제네바 농무관보), 이창범 (사무관, 후에 농무관 부임) 등 농림수산부 관계자들과 한 팀이 되어 호흡을 맞추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는 출장 때마다 최세균, 서진교, 임정빈 연구원 등이 돌아가면서 협상에 동행하여 자료검토와 정리 등 협상 준비를 위해 나를 도왔다.

나는 한국 농민과 농업을 대표하여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내 발언에 우리 농민과 농업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매월 열리는 협상을 위해 사전에 GATT 사무국으로부터 배부된 문건에 대해 사전 검토를 하고 우리 입장과 회의에서 해야 할 주요 발언 요지 등을 정리한 정부 방침을 만들어 토론에 참여했다. 나는 때로는 우리의 찬성, 또는 반대를 기록에 남기기 위해서, 어느 때는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 가끔은 상대국들의 발언을 비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했다.

귀국 후에는 회의 결과를 정리 평가하여 보고하고, 다음 협상을 준비하여 제네바로 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매달 밤낮이 바뀌고 식사와 잠자리가 바뀌는 불규칙한 생활 속에 긴장이 반복되면서 스트레스는 쌓여 갔다. 8월경 갑자기 혈압도 높아지고 부정맥이 발생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을 누구와 상의 할 수도 없을뿐더러 회의참여를 중단할 수도 없었다. 나는 상황에 따라 제네바 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워싱턴이나 브뤼셀 등을 별도로 방문하기도 했다. 1991년 한 해 동안 나는 총 12차례 134일간 제네바를 비롯하여 브뤼셀, 워싱톤, 도꾜 등을 여행하며 각종 회의에 참석하는 등 강행군을 했다. 체력적 한계를 느끼면서도 오직 소명의식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일정들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이어 나갔다. 【참고로 1991년 38개국 회의 참석을 위한 월별 여행 기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26~3.3(6일, 제네바-브뤼셀); 3.10~3.20(11일), 4.13~4.21(9일); 5.11~5.20(10일); 6.8~6.21(14일); 6.29~7.5(7일); 7.20~7.28(9일); 8.18~8.31(14일, 도쿄-제네바); 9.14~10.6(23일, 제네바-워싱톤-시카고-제네바); 10.14~10.20(7일, 제네바); 10.26~11.3(9일, 워싱톤 USTR-제네바); 12.8~12.22(15일)】

던켈 총장이 주재하는 38개국 회의는 마치 법안을 축조심의 하듯 한 문장 한 문장에 대해 협상 참가국들의 합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각 문장에 대해서 주요 국가들 의견제시가 없으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의견이 없다’는 것은 ‘찬성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걸린 문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입장을 이야기하고 속기록에 남겨두는 것이 필요했다. 양자 협상에서 문제가 생기면 속기록에 남아있는 발언이 정상참작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 최소의무수입물량 보장, 허용 및 감축 대상 보조금 규정, 수출보조금, 개도국 특례, 그리고 비교역적 관심 사항(NTC) 등 주제별로 용어, 개념 하나하나, 문장 하나에 대해 회원국 간 논의를 거쳐 합의점을 찾아 나갔다.

던켈 총장 주도로 만들어 가는 UR 농업협정문은 세계최초로 ‘세계 농업 질서’를 만드는 농업정책과 무역에 관한 국제규범이 된다는 점 때문에 우리 관심 사항인 개도국 지위확보와 비교역적 관심 사항을 협정문에 반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협정문의 한 자 한자는 곧바로 국내농업의 개혁을 불러올 조치들이다.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은 변함없이 UR 농업협상의 대원칙으로 강조되고 있었다. 쌀에 대한 시장개방 예외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고지다.

하지만 협상이 끝난 것은 아니어서 성급한 포기란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협상의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협상의 황금률을 붙들고 기필코 협상의 막판에 쌀에 대한 예외조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보조금 조항에 대한 논의에서는 우리 농업의 현실에 맞는 구조조정 등을 지원할 수 있는 허용대상 보조금의 종류와 범위를 확대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반영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던켈 총장 사회로 집중적인 논의 끝에 마침내 ‘UR 농업협정문 최종안 초안’이 완성되었다. 던켈 총장은 농업협정문 초안을 포함한 ‘UR 협정문 최종안 초안’을 1991년 12월 20일 UR 무역협상위원회(TNC)에 상정했다. EU를 비롯한 한국과 일본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991년 UR 협상을 마무리 짓는 회의는 최종적인 협상 타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던켈 총장이 제출한 최종협정문 초안을 앞으로 있을 국별 이행계획서 작성, 양허 협상 등의 기초로 사용한다는 데 합의했다. 사실상 UR 협상 타결을 위한 규범이 될 협정문 초안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EU가 여전히 많은 쟁점에 대해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한국과 일본도 쌀에 대한 예외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UR 협상은 1992년으로 또 한 해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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