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농촌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서울로 도시로 떠났다. 그런 탓에 서울행 열차는 언제나 일자리를 찾아, 희망을 찾아 탈농이촌 하는 시골 사람들로 가득 찼다…만원 완행 열차 안에서 만난 그들은 ‘분노의 포도’들이었고 ‘분노의 쌀’들이었다.

1964년 대학 1학년 후 학기 시작과 함께 서울-수원을 오가는 기차통학을 시작했다. 흑석동에 중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형의 도움으로 어렵게 구했다. 새벽녘에 서울역으로 나가 하행선 기차를 타고 수원에서 내려 등교했다가 오후 귀경길에는 1주일에 서너 번씩 용산역에서 내려 흑석동에 들러 학생을 가르치고 다시 신촌 셋집으로 돌아오는 고달픈 생활이었다. 대학 2학년 중반을 넘기며 나는 수원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 행정실 학생과 교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도움을 청했다.

대학 2학년 봄, 농번기가 되자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에서 농촌봉사 활동을 할 희망자를 모집했다. 농촌체험을 위해 개척단에 참가하여 경남 밀양군 산내면의 한 마을을 찾았다. 우리 일행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주민과 같이 날이 어두워져 모가 안 보이고 허리를 펼 수 없을 때까지 모를 냈다. 난생처음 농사일의 고통을 체험했다. 저녁에는 마을 청년들과 어울렸고 나는 박재문이란 또래 마을 청년을 만나 농촌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사 활동을 마치고 마을을 떠난 후에도 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농촌 현장 이야기들을 계속 듣게 되었고 나는 농의 어려운 현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가슴 아파하기 시작했다.

기차 통학은 육체적으로는 고달팠지만 세상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삶의 현장이었고, 우리 농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는 산교육 장이었다.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하여 2, 30여 분만 달리면 차창 밖은 논과 밭, 산과 농촌 마을이었다. 서울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희망의 도시로 변하고 있으나 농촌은 과거의 정적(靜的)에 멈춰버린 듯했다. 농촌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서울로 도시로 떠났다. 그런 탓에 서울행 열차는 언제나 일자리를 찾아, 희망을 찾아 탈농이촌(脫農離村), 이촌향도(離村向都)하는 시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수원에서 귀경 열차를 타면 서울역까지 1시간 반 이상을 서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원 완행열차 안에서 그들과 몸을 부대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읽었다. “배고픈 사람들의...마음속에는 분노라는 포도가 하나 가뜩 자라나서 제철을 찾아 주렁주렁 소담하게 무르익고 있다.” 그 무렵 읽은 존 스타인벡 (1902-1968)의 소설처럼 그들은 ‘분노의 포도’들이었고 ‘분노의 쌀’들이었다. 나는 농촌 사람들을 서울로 내모는 우리 농의 상대적 낙후성의 역사적 현실과 서울과 시골의 불평등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1차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가면서 나라 경제는 도시화-공업화로 탄력을 받아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나 도시-농촌 간의 상대적 발전 격차는 더욱 확대되었다. 나는 도시화-공업화로 인한 ‘산업화 충격’이 농가 경제와 농업, 농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궁금했고 이 때문에 대학원 시절 ‘도시화-공업화에 따른 농가소득의 지역적 격차에 관한 연구’라는 제하의 석사 논문까지 쓰게 되었다. 이후 ‘산업화 충격론’은 내 연구의 중심주제가 되었고 산업사회 농촌발전전략과 농촌정주생활권 개발구상, 산업사회 신 농정비전과 정책과제 등의 연구로 이어졌다.

대학 2학년 2학기 때 우연히 송용섭이란 학과 선배로부터 ‘농사단(NSD)’이라는 학생단체 가입을 권유받고 우리 농을 정치, 경제, 사회의 관점에서 공부하는 학습단체라는 그의 소개에 끌려 모임에 참석했다. 캄캄한 밤에 모인 단원들은 전깃불 대신 촛불을 켜고 “삼천만 잠들은 때 우리는 싸워/배달의 농사 형제 울부짖던 날/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진리를 외치는 형제 그립다/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 역사/삼천리 방방곡곡 농사 깃발이여/찬란한 승리의 그 날이 오기를/춤추며 싸우는 형제 그립다”라는 단가(이후 개사되어 농민가로 불림) 제창으로 모임을 시작하여 밤늦도록 토론을 했다. 어둠 속에서 처음 따라 부른 단가는 젊은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나는 마침내 뜻을 같이하는 형제들을 만난 기분이었다. 농대 캠퍼스에서 NSD는 진보적 이념 서클로 통했고 5.16이후 학교와 사찰 당국의 요주의(要注意) 관찰 대상이었지만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NSD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고 매주 한 차례씩 모이는 NSD 세미나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우리 농의 정치 경제사를 비롯하여 일반적인 역사, 문화, 사회, 철학 등의 책과 논문을 읽고 토론했다. 단원들은 우리 농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농민들이 사람 대접받고 웃으며 살 수 있는 그 날을 만드는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토론하며 날밤을 새우곤 했다. NSD는 계몽적, 또는 감상적, 봉사 활동 중심의 농촌운동을 지양하고 농업·농촌 발전과 농민을 억압하는 정책과 제도개혁을 위한 농정활동 참여를 강조했다.

NSD와 관계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수료한 후 미국유학을 떠나던 1972년 6월 초까지 거의 7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NSD를 이끌며 후배들을 지도하는 위치가 되었고 NSD를 거쳐 간 선배들과도 폭넓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벌써 고인이 된 김성호, 구윤서, 최민호, 김상형, 이용화, 최익수, 김성수 선배와 나광호 후배, 그리고 윤효직, 김성훈, 김준기, 임정남, 고일웅, 허신행, 강태석, 송용섭, 신명철 등 선배들이 있다. 동기생 이영돈과 오항렬, 김용택, 한규근, 허원령, 김영복, 이수양, 조종수, 조광호, 안병학, 임윤식, 최병익, 김정주, 안종운 등 후배들도 생각난다. 특히 김성호와 구윤서 선배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이들 가운데는 우리 농학교육과 조사연구, 농촌지도, 농협, 농정분야 등에서 크고 작은 흔적과 공과를 남긴 이름들이 많아 새삼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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