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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7>전환시대의 경제 논리와 개방농정을 비판하다-⑤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성공한 한국적 농촌근대화운동이다
   

우농(愚農) 최양부

마을주민을 새마을운동에 참여시킨 또 다른 동력은 정부의 친 농민적 농업정책 추진이었다. 정부는 농어민(새마을)소득증대 특별사업, 주곡 증산을 뒷받침하는 이중곡가제 등 고미가 정책과 저리의 영농자금과 저가의 비료와 농약 공급 등 다양한 농가소득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새마을운동이 어떤 성격의 운동인지,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사회혁신 운동을 구성하는 요소에 따라 새마을운동을 추상적인 이론모델로 재구성해 보기로 했다. 새마을운동 관련 문헌을 토대로 운동의 주체와 참여자들, 그들의 가치지향과 목표달성을 위한 과제와 수단, 추진전략과 행동준칙 등을 정리하고 그것들이 적합하게 설정되었는지, 정치·경제·사회 환경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지 등을 따져보았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가꾸기운동’으로 시작되어 1971년 11월 전국 3만3267개 마을(행정리·동)에 335포대의 시멘트를 지원하고 마을별 사용실태 평가를 통해 추진전략을 수립하면서 1972년부터 본격화되었다. 1972년 4월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가치, 목표와 사업, 추진전략 등 이념적 틀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농민 스스로 힘을 모아 빈곤을 타파하고 소득을 증대시켜 부유하고 품위 있고 상부상조하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잘살기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박 대통령은 농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라는 ‘할 수 있다 정신(can-do spirit)’을 고취 시키고, ‘근면, 자조, 협동’이란 새마을정신을 함양하는 정신계발(啓發)과 실천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 노래’까지 만들며 새마을운동의 모든 것을 설계하고 연출한 기획자 겸 총감독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중화학공업과 함께 유신독재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명분이자 목표였다. 그는 새마을운동을 ‘유신이념의 실천도장’이라고도 했다. 박 대통령은 5.16 직후 추진했던 ‘재건국민운동(1961-64)’이 관 주도의 주민 강제 동원으로 실패한 경험을 살려 새마을운동은 마을주민이 합의를 통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근면, 자조하고 협동 정신이 왕성한 ‘우수마을 우선지원 원칙’을 세우고, 열정을 가진 남녀 새마을지도자를 발굴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도록 했다.

그는 1970년 농민 하사용의 성공사례 발표를 듣고 감동한 후 1971년 6월부터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의 때 농민의 성공사례를 발표하도록 했다. 1979년 10월 서거 직전까지 9년간 150여 명의 성공한 농민 사례를 발굴하고 그들을 ‘새마을 기수’라고 칭송했다. 새마을지도자 정신교육을 담당한 새마을지도자연수원(원장 김준)은 남녀 새마을지도자와 정부의 국장급 이상 고위공직자 등이 같이 교육을 받고 새마을 기수의 성공 이야기를 들으며 할 수 있다는 새마을정신으로 재무장하는 ‘용광로’가 되었다.

박 대통령은 중앙의 모든 부처와 지방의 모든 공무원이 앞장서서 마을과 주민을 지원하고 계도(啓導)하도록 했다. 1973년 1월에는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3월에는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운동을 진두지휘했다. 농협은 새마을운동과 농협운동의 일체화를 외치며 마을 단위에 영농회, 부녀회, 청소년회 등을 조직하고 새마을운동에 앞장섰다. 정부는 매년 마을별로 새마을사업 추진 실적을 평가하고 ‘기초·자조·자립’ 3단계로 마을 등급을 매겨 우수마을에는 마을 전화(체신부)와 전기가설(상공부, 한국전력공사) 등을 차별적으로 지원하며 마을간 경쟁을 유도하고 농민 참여를 이끌었다. 농민은 자기 마을이 더 높은 등급을 받아 전화를 설치하고 전기를 끌어와야 한다는 집단적 압력을 받으며 운동에 참여(해야만)했고, 마을승급을 위해 정부가 제시한 목표사업추진에 필요한 노동력과 경비를 부담하고, 마을 길 확장을 위해 개인토지를 마을에 희사(해야)했다. 1972년 전체 마을 중 7%였던 자립마을이 1977년에는 67%가 되었으며, 53%였던 기초마을은 모두 자조 또는 자립마을이 되었다. 전기보급은 1970년 전체 마을의 20%에서 1978년 98%로 확대되면서 농촌에서 등잔불이 사라졌다.

마을주민을 새마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또 다른 동력은 정부의 친 농민적 농업정책 추진이었다. 정부는 농어민(새마을)소득증대 특별사업, 주곡 증산을 뒷받침하는 이중곡가제(二重穀價制) 등 고미가(高米價)정책과 저리의 영농자금과 저가의 비료와 농약 공급 등 다양한 농가소득정책들을 추진하였다. 특히 1972년 이후 통일벼 신품종 보급을 통한 쌀생산량의 획기적 증대와 쌀값 지지로 인한 농가소득증대는 새마을운동을 견인하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새마을운동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으로 1977년 주곡자급을 달성한 녹색혁명과 함께 농촌을 근대화시킨 또 하나의 한국의 기적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마을주민의 참여와 66천 여명의 남녀 새마을지도자의 헌신과 열정, 공무원과 농협 임직원의 열성적인 지도와 독려,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였다. 새마을과 주곡자급 운동은 농촌을 환골탈태시키고, 농가소득을 증대시켜 빈곤을 퇴치하고 도농 간의 소득 격차를 축소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농민을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새로운 자신감으로 깨어나게 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유신독재의 강제 동원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추진전략으로 관 주도의 하향식과 새마을지도자와 농협주도의 상향식 방법을 혼용하며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성공적으로 이끈 한국적 농촌근대화모델이요 전략이자 정책이고 사업이자 운동이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1979년 10월 26일 갑작스러운 박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추동력을 잃고 한순간에 추락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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