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 최양부

스위스 제네바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11월의 낙엽 진 제네바는 음산했다. 처음 겪어보는 38개국이 참여하는 농업협상위원회의 ‘다자간 협상’이 생소하고, 특히 우리 농업과 농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다른 나라들과 ‘협상’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짓누르는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틈나는 대로 영국 런던공항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협상은 어떻게 하는가? (How to Negotiate?)’라는 책을 탐독했다. 그 책에서 처음으로 접한 ‘협상의 황금률’로 알려진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다(Nothing is agreed until everything is agreed)’라는 글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한마디에 응축된 협상의 정수(精髓)를 터득하기까지는 3여 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정말 UR 농업협상은 1993년 12월 15일 협상 마감 시간을 앞두고 마지막 한 주에 극적으로 모든 것이 타결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타결의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협상의 극적 타결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피 말리는 긴장 속에서 밀고 당기는 길고도 험한 협상 과정을 인내심과 끈기,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이겨내야만 했다.

모든 협상에는 상대가 있고, 공짜는 없다. 모든 협상에는 서로가 만족할 만한 것을 주고받는 흥정이 있다. 내가 바라는 목표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가 요구하는 것을 일정 부분 수용해야 한다. 그마저도 협상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고 협상 기술도 갖추어야 한다. 협상장에서 정교한 논리를 앞세워 상대를 설득하고, 상대의 이해와 자비를 구하면서 때로는 ‘진실 어린 거짓’과 끈질긴 고집, 버티고 압박하고, 위협하고 허세 부리기, 벼랑 끝 전술 등과 같은 다양한 협상 기법들이 필요하다. 협상용 카드도 단계별로 준비하여 밀고 당기다 때를 보아 상대와 주고받기를 통해 합의를 보는 결단과 용기 또한 빼놓을 수 협상의 요소다.

그런데 UR 농업협상은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과 생산촉진형 보조금 삭감’이란 대원칙을 세워놓고 협상을 위해 원칙부터 수용하라고 우리를 압박한다. 이 원칙을 수용할 경우 우리 농업과 농민이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나라와 농민과 농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최선책인가’라는 협상의 무게가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협상을 생각하다 잠이 들고 잠에서 깨면 다시 협상을 생각했다. 그러나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호텔 방에서 혼자 고민하며 깊은 상념(想念)에 빠져있던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문득 ‘하나님’을 찾았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나님, 왜 제가 이 짐을 져야 합니까? 왜 저에게 이 짐을 지게 하십니까?’ 그 순간, 나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농대에 진학하고, 계획에 없던 대학원에를 가고, 생각지도 못한 미국 유학까지 가서 농업경제학 박사학위 공부를 한 것은 UR 이란 어려운 일을 당한 우리 농업과 농민을 위해 일하도록 준비시킨 것이다’라는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때 나는 내가 제네바에 와있는 것은 UR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농민과 농업을 위하라는 ‘하나님의 소명(召命)’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농업과 농민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이후 나는 UR 농업협상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 밀린 UR 공부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86년 9월에 시작한 UR 협상은 4년 넘기고 1990년 12월 3일부터 7일까지 열리는 브뤼셀 통상장관회의에서 마무리 짓는 것으로 예정되어있었다. 그러나 지난 4년간의 협상은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데다, 특히 농업협상 분야에서 미국과 EU가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등 농산물 수입국들도 드쥬 의장 초안에 강력하게 반대하며 쌀 등 주요 품목에 대한 개방 예외를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GATT의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원칙’에 대해 예외를 인정받을 수 있는가였다. 한국과 일본, 이스라엘, 스위스, 캐나다 등은 특정 농산물,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의 쌀 등이 수행하는 식량안보와 환경보전, 수자원함양, 농촌 지역사회개발 등 ‘비교역적 관심 사항(NTC, Non-Trade Concerns, 이 용어는 후일 농업의 다원적, 또는 다목적 기능으로 부르게 되었다)’을 반영하여 이들 ‘NTC 품목’에 대해서는 개방 예외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NTC란 ‘예외 없는 개방’을 주장하는 미국과 호주, 브라질, 등 수출국에 맞서 한국과 일본, 이스라엘 등이 수입국 입장을 반영하여 ‘국가별 농업의 다양한 특수성’을 주장하고 ‘개방 예외’를 주장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였다.

12월 3일이 가까워지자 브뤼셀 GATT 통상장관회의에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적인 이목과 관심이 집중되었다. 수출국과 수입국 간의 줄다리기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2월 1일 나는 제네바에서 브뤼셀로 이동하여 정부대표단에 합류했다. 브뤼셀에는 EU 회원국 등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2만 명이 넘는 농민들이 UR 농업협상 반대시위를 하고 있었다. UR 농업협상 정부대표단은 조경식 장관을 단장으로 조규일 차관보, 김정룡 국장, 천중인 농무관으로 구성되었으며 나는 장관 자문관자격으로 참가했다. 나에게는 뜻밖에도 조 장관을 수행하여 장관급 협상 대표회의 배석자로 참석하는 중책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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