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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5> 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길을 찾아 나서다 -④한국, 읍면농협 중심으로 농업·농촌·농민을 재조직하다
   

우농(愚農) 최양부

정부는 모든 이동에 농협을 설립하고 모든 농가를 농협에 가입하도록 했으며, 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시군과 이동농협 조합장은 중앙회장이 임명했다. 농협은 무늬만 ‘농민들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이었지 반협동조합적이고 비민주적인 명분과 실제가 다른 관제농협이 되었다.


북한은 1946년 농지개혁으로 독립 자영하는 가족농체제를 창설했으나 1953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마을체제를 없애고 300호 농가를 기본단위로 대형 리를 신설한 다음, 1962년에는 가족농체제를 해체하여 농지는 공(국)유화하고 농가는 농지 없는 농업노동자 가구로 만들어 리단위로 설립된 협동농장에 편입시키면서 혁명적인 사회주의 농업·농촌개조사업을 완료했다.

한국은 1950년 농지개혁으로 내 땅을 소유한 독립 자영하는 가족농체제를 확립하고 1957년 이동(里洞)과 시군에 구·판매경제사업을 하는 농업협동조합을 설립했으나 농민들의 이해 부족과 자기 자금 부족 등으로 활성화하지 못했다. 1961년 5.16쿠데타 직후인 8월 15일 군사정부는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을 통합하여 정부의 농업·농촌개발사업을 대행하는 준정부기관으로 새 농업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새 통합농협은 농협중앙회와 8개 도지부, 이동농협 2만1042개, 시군농협 140개와 330개 지소, 축산, 과수 등 품목 중심 특수농협 101개로 조직되었다.

독립 법인으로 설립된 이동, 시군 및 특수농협은 자신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별도의 독립된 자본금을 가진 특수법인으로 설립된 농협중앙회의 회원조합으로 의무적(강제적)으로 가입하고, 중앙회는 이들을 지도 육성하고 감독하는 상급기관이 되었다. 회원조합은 중앙회 산하기관과 같은 성격의 하부조직이 되었다. 정부는 모든 이동에 농협을 설립하고 모든 농가를 농협에 가입하도록 했으며, 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시군과 이동농협 조합장은 중앙회장이 임명했다. 농협은 무늬만 ‘농민들의 자주적인 협동조직’이었지 반 협동조합적이고 비민주적인 명분과 실제가 다른 관제농협이 되었다. 이후 농협은 1987년 민주화로 1989년 중앙회장과 조합장 직선제를 시행할 때까지 28년간(1961~1989) 준정부기관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제기된 농협의 ‘정체성 혼란’은 1970~1980년대 농민들의 ‘농협 민주화 운동’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1961년 새로 출범한 통합농협의 당면과제는 미설립 이동에 농협을 설립하고, 미가입 농민의 농협가입과 조합원의 농협에 대한 인식제고, 자기 자금조성 등이었다. 이를 위해 이동농협 조합장과 임원에 대한 지도 교육이 시급했다. 농협은 중앙회에 농촌지도원 156명, 시군조합에 개척원 711명을 채용하고 이동농협설립과 경영지도, 조합원들의 영농 및 생활개선지도를 하며 특히 이동농협과 시군농협 간의 유대강화를 위한 사업개발 등을 추진했다.

1962년 말까지 전국의 이동농협은 출범 당시 2만1042개에서 2만1518개로 증가하였고, 조합원 농가도 222만7000호로 전 농가의 90%가 농협에 가입했으며 이동농협의 평균 조합원 농가는 89호였다. 정부와 농협은 규모가 영세한 이동농협 대신 규모가 큰 시군농협을 중심으로 농민에 대한 영농자금지원이나 비료공급 등의 정책사업을 추진했다. 1962년부터는 민간의 비료 취급을 금지하고 농협에 비료공급독점권을 부여했으며, 농민지원 정책금융창구도 농협으로 일원화함으로서 농민들은 농협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상적인 농업생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농협은 농가를 조직하고 농민을 통제하며 정부 정책사업을 대행하는 준정부기관이 되었다.

농협은 1962년 10월에 실시한 전국 이동농협 심사결과를 바탕으로 이동농협 운영 활성화를 위한 자기 자금조성 운동과 함께 ‘자립하는 농민, 과학하는 농민, 협동하는 농민’이란 ‘새농민상’을 제시하며 ‘새농민 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이동농협 규모 확대를 위한 이동농협 간 합병을 추진했다. 농협은 제1차 합병 운동(1964~1967)으로 영세농협을 인근 우수농협에 합병하고 농협당 조합원 규모를 최소한 200호 이상이 되도록 했다. 농협은 1967년까지 1963년 당시의 2만1239개 이동농협을 1만6963개로 합병시켰으며 평균 조합원은 139호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농협은 이동농협의 자립화를 위해 1969년부터 ‘1 읍면, 1 농협 설립 원칙’을 새로 정하고 제2차 합병 운동(1969~1973)을 추진했다. 농협은 1969년 당시 7525개로 합병된 이동농협을 1972년까지 1567개 읍면농협으로 1년 앞당겨 합병을 완료하고 조합당 평균 조합원을 1393명으로 대폭 확대했다. 합병된 읍면농협에 대해서는 시군농협이 수행하는 농사자금과 식량 증산을 위한 비료와 농약, 농기계 등 영농자재공급업무를 먼저 이관하고 상호금융업무를 비롯한 농산물 수매와 방출 등과 같은 정부 위촉사업과 생활물자공급을 위한 연쇄점 개설하고 구매업무를 할 수 있게 했으나 중앙회(도지부)의 지도 감독과 통제를 받았다. 정부는 1973년 3월 공식적으로 읍면농협을 구·판매와 금융사업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단위조합(농협)으로 법적 지위를 확립했다. 이로써 우리는 시군과 읍면농협을 기본단위로 전 농가와 농업·농촌을 재조직하고 농협을 통한 대 농민 정책 추진 기반을 구축했다.

그러나 이동농협의 광역화는 처음부터 농민 조합원 본위의 조치라기보다는 조합경영수지개선과 경영 자립화를 위한 조치였다. 시군농협 업무 일부가 읍면농협으로 이관되면서 조합원의 불편이 일부 개선되기도 했으나 오히려 농협과 조합원 간의 이동 거리가 확대되면서 조합원들의 농협 활동 참여와 이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읍면농협은 조합원 불편 해소를 위해 1974년까지 농협 하부조직으로 마을 단위에 협동회 3만5454개, 생활개선을 위한 부녀회 7914개를 조직하고, 조합 내 동일작목을 재배 사육하는 농가를 중심으로 생산·판매를 협동으로 하는 작목반 7029개를 조직했으나 이 조치들도 조합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농협은 여전히 조합원이 주인인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동조합과는 거리가 먼 무늬만 협동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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