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5년 유학 생활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박사 논문 쓰느라 타자기와 씨름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A4용지 468쪽 분량의 원고를 3번 고쳐 쓰면서 손가락이 터지라고 타자기를 두드렸다. 초고부터 다섯 분 심사위원들의 검토를 받으며 3번의 수정작업을 거쳐 최종원고를 완성했다.


1977년 5월,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마지막 구두시험을 마치자 멜빈 브레이스 지도교수가 회의실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라고 하셨다. 심사위원은 다섯 명으로 주심은 농업경제학과 브레이스 교수가 맡고 해롤드 브라이마이어, 철학과의 존 쿨천, 경제학사를 전공한 경제학과 존 머독 (John C. Murdock), 사회발전론 전공의 사회학과 달 홉스 (Darl J. Hobbes) 교수로 구성되었다.

심사위원들과 구두시험에서 나눈 대화 대부분은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브라이마이어 교수가 던진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이론이 한국에서 쓸모가 있을 것 같으냐?’는 마지막 질문은 아직도 생생하다. 박사 논문 말미(末尾)에 인용한 피터 모린 (Peter Maurin)의 ‘지식인과 부르주아’란 시를 언급하면서 ‘지식인이 농민이 되어야 농민도 지식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한국의 농민이 누구인지,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고, 어떻게 서로 협력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한국 농민에게 쓸모있는 농경제학자가 되고 싶다’라고 답했다.

심사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초조와 긴장 속에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5년 유학 생활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박사 논문 쓰느라 타자기와 씨름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A4용지 468쪽 분량의 원고를 3번 고쳐 쓰면서 손가락이 터지라고 타자기를 두드렸다. 초고부터 다섯 분 심사위원들의 검토를 받으며 3번의 수정작업을 거쳐 최종원고를 완성했다. 교수들은 매번 잘못 사용한 영어단어와 문장을 고쳐주는 것은 물론 의문이 가는 부분은 별도 의견을 달아 검토하도록 했다. 심사위원들이 마치 자신의 논문처럼 학생이 쓴 논문을 꼼꼼히 살펴주는 자세에 새삼 놀라며 감사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지도교수가 ‘부, 축하한다(Congratulations, Boo!)’라는 말과 함께 최종구두시험 통과를 알려주며 악수를 청했다. 마침내 박사학위 취득을 위한 모든 절차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학과 전통에 따라 과(科) 교수님들과 대학원생 모두를 학교 앞 호프집에 초청하여 맥주파티를 열었다.

브레이스 지도교수를 찾아가 감사하며 마지막 하직(下直) 인사를 드렸다. 내가 철학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흔들림 없는 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체류 기간연장 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도와주셨고. 농업개발협회 장학금이 4년으로 만료되자 앞장서서 마지막 1년은 학과 장학금을 주선해 주셨다. 그는 내가 논문 초고를 마무리하자 ‘이제 터널 끝이 보인다’며 안도하셨다. 그는 묵묵히, 그러나 가슴 졸이며, 내가 박사학위과정을 모두 마칠 때까지 5년간 나를 믿고 내 곁을 지켜주신 든든한 후원자이자 멘토였다.

브라이마이어 교수를 찾아뵙고 작별인사를 드렸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논문(truly outstanding dissertation)’을 썼다. 네가 자랑스럽다‘고 하시며 문서함에서 편지를 꺼내 읽어보라고 하셨다. 5년 전 내가 처음 찾아가 전했던 사우스워스 교수의 추천장이었다. 석 장에 빼곡하게 쓴 자신이 가르친 애(愛)제자를 다른 선생에게 소개하며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추천장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내가 한국의 낙후지역이며 쌀 주산지인 전라남도 출신으로 아버지의 이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며 나의 출신 배경을 간단히 적은 다음, 1968년에 만나 4년간 나를 지켜본 소감을 솔직하고 소상하게 적었다. 내가 자기 강의를 들었고 강의 통역도 했으며 특히 석사졸업논문을 잘 썼다고 부연(敷衍)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힌 꽉 막힌 젊은 경제철학도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경험적 사실을 중시하는 열린 경제과학도로 성장했으며 항상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고 논리적이고 농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으로 농업문제를 경제·사회학적으로 연구하고 싶어 해 미주리대학교로 보낸다고 쓰셨다. 마지막으로 27살의 젊은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가끔 관심 가지고 살펴달라고 부탁하셨다. 사우스워스 교수는 ‘나의 장래의 학문적 기여를 보며 그를 지도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도 하셨다. 나는 사우스워스 교수가 나를 얼마나 주의 깊게 관찰했고 내 생각을 읽고 내 미래를 생각하셨는가를 처음 알았다. 나는 그의 진솔한 편지에 새삼 놀라고 감동했다. 브라이마이어 교수는 사우스워스 교수 말씀대로 틈틈이 나를 불러 내 생각을 물으셨고 내가 철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는 것을 적극 지지해주셨고 논문의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주셨다. 두 분은 나를 바른길로 인도한 내 인생의 멘토였다.

1977년 10월 브레이스 교수는 박사 논문을 미국농업경제학회장을 지낸 애리조나대학교 모리스 켈소(Maurice M. Kelso) 명예교수에게 보내 논문에 대한 평가와 출판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는 내 논문을 한마디로 ‘놀랍다(remarkable!)’라며 바로 출판을 추진하라고 하셨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에서 귀국한 뒤 1978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영문저널(Journal of Rural Development) 창간호에 박사 논문의 일부를 축약하여 ‘농업경제학의 이상(理想): 응용경제학적 농업경제학에 대한 비판’이란 논문을 기고했다. 미국농업경제학회장을 지냈고 농업개발협회 총재를 지낸 미네소타대학교 버논 루탄(Vernon W. Ruttan) 교수는 내 논문을 ‘아주 잘 쓴 훌륭한 논문(well-written excellent paper)’이라고 평가하는 편지를 보내주셨다. 4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박사 논문을 제대로 세상에 알리지도 않았고, 특히 우리말로 번역조차 하지 않고 사장시켰다는 미안함과 아쉬움, 그리고 우리 농민에게 쓸모 있는 농경제학자가 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내 소임(所任)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성과 후회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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