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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2>춥고 배고팠던 한겨울의 한반도/③한반도를 둘러싼 역사의 우연과 필연
   
 

우농(愚農) 최양부

해 방직후 남쪽은 전 농지의 65%가 소작지였고 농민들은 수확량의 70%에 달하는 고율소작료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농지개혁은 미군정의 당면한 과제였다. 미군정은 1946년 2월부터 일본인 소유 토지를 귀속하고, 소작료도 30%를 넘지 못하게 했다.


1948년 5월 10일 한반도 남쪽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30일 국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고, 7월 17일 자유민주주의를 기본가치로 하는 대한민국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20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8월 15일 마침내 1919년에 꿈꾸었던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초대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때가 내 나이 3살 때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시작된 미·소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분단의 땅에서 태어나게 된 남과 북의 해방세대들은 운명적으로 각각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과 인민민주주의)를 배우고 자라는 한반도 최초의 분단세대가 되었고 이제 73살이 되었다. 지난 70년간 남북은 상생하고 협력하기 보다는 치열하게 대결하는, 이념과 체제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가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역사의 우연이었고 필연이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이후 1948년 8월 15일까지 3년간 38도선 이남을 통치했다. 미군정은  식량부족사태 해결을 위해 ‘점령지역구호정부자금 (Government Appropriation for Relief in Occupied Areas, GARIOA)’으로 미국 농산물 도입을 시작했다. 1946년 5월에는 ‘중앙식량행정처’를 신설하고 양곡시장유통을 통제했다. 1947년 12월 ‘농업기술교육령’을 공표하고 연구·지도·교육을 통합한 미국식 농촌지도방식 도입을 위해 국립농사시험장에 ‘농사교도국’을 신설했다. 우리나라 농업연구와 농촌지도의 기본 틀이 그 때 처음 만들어졌다.

해방직후 남쪽은 전 농지의 65%가 소작지였고 농민들은 수확량의 70%에 달하는 고율소작료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농지개혁은 미군정의 당면한 과제였다. 미군정은 1946년 2월부터 일본인 소유 토지를 귀속하고, 소작료도 30%를 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1946년 3월, 북의 농지개혁 소식이 전해지면서 남쪽 농민들의 개혁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지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친 미군정은 전면적인 개혁은 단독국가수립 이후로 미루고, 1948년 3월 ‘중앙토지행정처’를 신설하여 귀속농지 26만여 정보를 소작농가에게 매각하고 소유권을 이전시켰다. 남에서 처음으로 ‘미완의 농지개혁’이 이루어졌다. 일부 지주들은 변화된 시대의 요구에 따라 소작인에게 농지를 매매하고 소유권을 넘기기 시작했다.

미군정이 당면한 최대과제는 한반도에 조속히 단일국가를 수립하고 철수하는 일이었다. 당시 미국 여론은 해외파병 군인들의 조속한 귀환을 촉구하고 있었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자국이익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철수요구가 거셌다.

미국은 소련과 협상하여 한반도에 4대국 (미·영·중·소) 신탁통치를 받는 국가를 수립하고 철수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1945년 12월 16일∼26일간 모스크바에서 열린 3국(미·영·소) 외무장관회의에서 5년간 4대국의 관리를 받는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하는 한반도 식탁통치방안을 확정했다.

1945년 12월 27일 신탁통치결정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남의 사회단체들은 일제히 신탁통치반대(‘반탁’)를 외쳤다.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과 11월 23일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는 연합하여 반탁운동의 중심에 섰고, 소련과 입장을 같이하는 미군정과도 대립하기 시작했다. 반탁을 외쳤던 남의 좌익진영은 북의 지시로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결국 찬탁·반탁운동은 남북분단 고착화는 물론 남을 좌·우 대결장으로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1946년 3월 한반도 신탁통치를 위한 구체적 실천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애서 열렸다. 소련은 한반도 임시정부수립방안을 논의하는 사회단체협의체를 조선공산당 등 찬탁단체들로만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반도 공산화의 야욕을 드러냈다. 미국이 한국민주당 등 반탁단체들의 참여도 허용해야 한다고 맞서면서 위원회는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1당 독재의 소련식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1894년 20세 때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웠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4년 고종의 밀사자격으로 미국에 간 이승만은 1905년부터 미국의 정치제도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여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라가 일제 식민지가 되자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를 한반도에 세워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연설에서 북에는 이미 김일성 공산국가가 세워졌다며 남에도 단독국가(정부)를 먼저 세운 다음 통일을 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미군정과 김구를 비롯한 좌익들은 이승만을 비판했다. 7월 김구는 이승만에 반대하는 조선공산당 등 좌익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고 단독정부수립 반대운동에 나섰다.

1947년 3월 소련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저지를 선언한 미국의 ‘트루먼독트린’의 영향으로 미·소간 냉전체제가 형성되었고, 5월에 열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다. 9월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고, 11월 유엔은 한반도에서 유엔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단일국가를 세우기로 결정했으나 소련은 거부했다.

1948년 3월 유엔은 남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결국 이승만의 주장대로 되었다. 좌익진영은 대대적인 총선거반대운동에 나섰고, 노조도 총파업으로 동참했다. 제주에서는 좌·우익간의 무력충돌로 ‘4.3 사태’가 발생했다. 김구는 통일국가건설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하고 4월 20일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단독정부수립과 총선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국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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