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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7>전환시대의 경제 논리와 개방농정을 비판하다-⑬80년대를 향한 새로운 대안 농정을 구상하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개방농정과 증산농정에 대한 양비론적 비판은 경제기획원과 농수산부로부터 비현실적이란 비판을 받았고 오히려 개방농정을 둘러싼 부처 간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농수산부는 새 구상이 개방농정의 증산농정 비판과 농민단체들이 증산농정을 강제농정이라고 비판한 것을 수용한 것에 대해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신군부의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주도하는 개방농정에 대한 농업계의 저항이 확산하고 있던 1980년 11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농정전환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적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대안 농정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한국농촌경제의 기본문제와 대책’수립을 위한 특별작업에 착수했다. 김동희 부원장이 책임자가 되었고 실무 책임은 내가 맡았다. 특별작업은 농정과제별로 작업팀을 구성하여 농산물수입과 가격, 농산물시장유통, 농업기계화, 축산개발, 농어촌사회복지개발 등등 농정 전반에 대한 새로운 정책방안을 수립하도록 했다. 1980년 11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 1차 작업으로 ‘80년대를 향한 새 농정패러다임’ 정리를 위해 전문가 초청 집중토론을 진행했다. 전문가로는 김성훈 중앙대(농업경제), 이천표 서울대(국제경제), 김학은 연세대(일반경제) 교수와 김영철 농협중앙회(농업경제), 송대희(KDI) 박사가 참여했다. 나는 토의 진행과 집필을 맡았고 그 결과를 정리하여 ‘80년대 새 농정방향의 구상(새 구상)’을 작성했다. 12월 27일 새 구상에 대해 각계 의견을 듣는 전문가 초청간담회를 가진 다음 2차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는 방침이었다

새 구상은 개방농정과 증산농정 모두를 양비론적 입장에서 비판했다. 개방농정이 비교우위론을 앞세워 농산물수입자유화정책을 급진적으로 추진한 것과 이중곡가제로 인한 양곡관리특별회계 적자 누적도 도시 소비자를 위해 정부 수매가격보다 낮게 판매하여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농민 보호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새 구상은 증산농정에 대해서도 1960~70년대 주곡자급달성을 위한 증산농정의 불가피성은 인정하나 목표 달성에 집착한 ‘강제농정’의 추진으로 품종선택 등 농민들의 자율적인 생산 활동을 저해하고, 농가에 대한 지원도 농가 간, 농업지역 간 소득 격차나 규모의 차이 등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추진하여 비효율을 낳았고, 대부분 쌀생산에만 편중되어 국민소득향상에 따른 농식품 소비변화에 대응한 다양한 농축산물 생산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새로운 제3의 대안을 제시했다.

새 구상은 80년대 한국사회가 도시 산업사회로 전환하고 있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 식품의 안정적 생산공급과 확보, 기간(基幹)적 전업농가의 선택적 육성, 농가지원체제의 합리적 조정, 농촌 지역 균형개발’ 등 4가지를 새로운 대안 농정으로 제시했다. 새 구상은 첫째 한국적 식생활을 재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장기종합식품계획’을 수립하여 국내공급능력향상을 위한 생산 기반을 재정비하고, 부족 농축산물의 수입 등 안정적 확보대책을 수립하며, 둘째 농업생산 효율화를 위해 농가의 장래희망과 현실여건(경지 규모, 경영주 나이, 후계자 유무 등)에 따라 전업농가를 기간 농가로 육성하고, 겸업이나 탈농희망 농가는 농외취업알선과 사회보장지원 등을 강화하고, 셋째 농가지원방식도 농가의 유형에 따라 가격, 소득, 비용보조 등으로 차별화, 다양화하고, 마지막으로 농촌개발은 농촌거점 도시와 배후지인 마을을 통합한 농촌주민들의 일상생활권(‘농촌경제권’)을 중심으로 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고 농촌공업개발 등을 추진할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새 구상의 양비론적 비판은 경제기획원과 농수산부로부터 비현실적이란 비판을 받았고 오히려 개방농정을 둘러싼 부처 간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농수산부는 새 구상이 개방농정의 증산농정 비판과 농민단체들이 증산농정을 강제농정이라고 비판한 것을 수용한 것에 대해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1981년 2월 연구원은 초대 김보현 원장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새 원장 선임을 앞둔 미묘한 시기에 새 구상 특별작업은 연구원에 후폭풍을 가져왔다. 특별작업은 전문가 초청간담회를 끝으로 중단되고 작업팀은 해체되었으며 연구책임자인 김동희 부원장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실무 책임을 맡았던 나는 특별작업 수행 중인 11월 돌연 ‘경제과학심의회의(경과심, 의장 장덕진 장관)’ 파견근무 명령을 받았고 새해부터는 경과심과 연구원을 오가는 생활을 해야 했다. 1981년 3월 김보현 원장은 김동희 부원장에게 원장직을 물려주겠다는 취임 당시 약속을 어기고 원장에 재임했다. 원장재임 직후인 1981년 3월 29일부터 20일간 나는 갑자기 내 전공과 관계없는 독일 서베를린에서 열리는 ‘동남아시아 협동조합법 비교세미나‘에 참석해야 했으며 귀국 후에는 1981년 10월 말 경과심이 폐지될 때까지 경과심 출근을 계속했다. 나는 그때 왜 내가 파견발령을 받았고 독일 출장을 가야 했는지 짐작만 할 뿐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김 부원장은 원장 선임이 무산된 후부터 원장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자신의 거취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김 부원장은 1981년 5월 19일부터 27일간 OECD와 공동연구과제 협의를 명분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나는 김 부원장을 찾아뵙고 연구원을 위해 부원장직을 지키려는 뜻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구차스럽게 보이고 또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생겨날지 모르니 차제에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는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1982년 3월 김 부원장은 결단을 내리고 부원장직을 사직하고 단국대학교 농과대학 농업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김 부원장은 1967년 9월 연구원의 본향(本鄕)인 농촌진흥청 농업경영연구소를 설립한 지 15년 만에 연구원과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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