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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9>민주화·개방화에 대응한 새 도전에 나서다-(4)GATT 발(發)‘개방화’라는 초대형급 태풍들이 몰려오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가입 당시 우리 정부 협상관계자들은 ‘우리가 언제 쇠고기를 수입해다 먹을 때가 오겠느냐?’며 협상 대상국 관심품목인 쇠고기를 양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21년 후인 1988년 우리가 쇠고기 수입 문제로 농산물 무역 분쟁을 겪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987년 10월 헌법 개정으로 ‘87 체제’라는 새로운 자유민주시대를 열었으나 대한민국은 거산(김영삼)과 후광(김대중)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정부가 새로 출범했다. 나라가 이처럼 정부 교체와 체제변환의 정치적 대격변을 겪고 있는 동안 스위스 제네바 레만호수 가에 있는 GATT(가트, General Agreement on Tariff and Trade,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서는 머지않아 우리나라를 강타하게 될 ‘개방화’라는 초대형급 태풍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의 단초(端初)는 우리가 제공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1986년부터 우리 국제수지가 흑자기조로 전환하게 되자 GATT 등 국제사회는 한국은 이제 무역적자에 허덕이는 가난한 나라가 아니니 GATT 회원국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농산물시장의 전면 개방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국제적 개방압력’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52년 전인 1967년 4월 14일 72번째 회원국으로 GATT에 가입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무역입국’을 선언하고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전략을 채택했다. 세계 시장진출을 위해서는 GATT 가입이 필수적이라는 미국의 권유와 지원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71)을 시작하는 해인 1967년에 GATT에 가입했다. GATT에 가입하면서 우리는 모든 회원국에 시장개방 등 GATT의 자유무역 원칙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약속했다. GATT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 이념과 체제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미국, 영국 등 자유 진영 국가들 상호 간 시장개방을 통한 자유무역으로 공동 경제번영을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회원국 상호 간 관세인하와 비관세장벽 제거 등 ‘최혜국대우원칙’에 따라 시장을 개방하고 자유무역을 추진해 왔다. 우리의 GATT 가입은 우리 경제를 자유 세계의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체제에 편입시키고 우리 시장을 세계 경제에 개방하는 ‘제2의 개항’을 의미했다.

그러나 1967년 GATT 가입 당시 우리는 만성적 무역적자에 허덕이는 저개발국가여서 국제수지가 개선될 때까지 농산물시장개방을 유예하는 GATT 제18조 ‘BOP(비오피, Balance of Payment, 국제수지) 조항’에 의거 시장개방을 유예했다. 다만 GATT 회원국들과 가입 협상을 하면서 회원국들의 요구에 따라 관세인하와 양허(讓許)대상품목 60개를 선정했다. 그때 쇠고기를 25% 관세로 ‘한도 양허(ceiling binding)’했다. 관세를 한번 한도 양허한 품목은 이해 당사국들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수입을 중단하거나 다시 관세를 올릴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시에는 이해 당사국들에 보상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경제보복을 받는 등의 구속력이 있다. 가입 당시 우리 정부 협상관계자들은 ‘우리가 언제 쇠고기를 수입해다 먹을 때가 오겠느냐?’며 협상 대상국 관심품목인 쇠고기를 양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21년 후인 1988년 우리가 쇠고기 수입 문제로 농산물 무역 분쟁을 겪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985년 소 파동 당시 정부는 농민 요구에 따라 ‘쇠고기 수입 전면 중단조치’를 취했다. 한국의 일방적인 쇠고기 수입중단조치는 미국 등 GATT 회원국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고 우리나라 농산물시장의 전면적 개방을 불러오는 불씨가 되었다. 당시 GATT는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과 농업보조금 삭감 등을 핵심 의제로 하는 후일 ‘우루과이 라운드(Uruguay Round, UR, 유알)’로 알려진 새로운 7번째 다자간 무역협상의 출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GATT 105개 회원국 통상장관들은 1986년 9월 우루과이에 모여 정식으로 UR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미국, 호주 등 GATT 회원국들은 우리가 한도 양허한 쇠고기를 일방적으로 수입금지 조치한 것은 GATT 규정 위반이라며 즉각적인 수입재개를 요구했다. 전두환 정부는 농민저항과 대통령선거 등 정치적 이유로 3년간(1985∼1987) 회원국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노태우 정부 출범 직후인 1988년 3월 우리를 GATT에 제소했다. GATT는 즉각 ‘쇠고기 패널(재판기구)’을 구성하고 심의에 착수했고 결국은 우리가 GATT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1989년 11월 GATT 이사회는 우리 정부에 쇠고기 수입금지조치를 즉각 철회하라고 통보했다.

우리의 쇠고기 수입금지 조치는 1987년 GATT ‘BOP 위원회’로 하여금 우리의 ‘BOP 졸업’ 여부 심의를 촉발하는 또 다른 불씨가 되었다. GATT로서는 오히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었고 우리는 작은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격이 되었다. 1989년 6월부터 본격적인 심의에 착수한 BOP 위원회는 10월 우리나라의 BOP 졸업을 결정했다. 그 결과 우리는 1967년 GATT에 가입할 당시부터 22년간 유지해온 농산물수입제한조치를 철폐하게 된다. 정부는 GATT 심의를 앞두고 1989년 4월 3일 ‘농림수산물 수입자유화 예시계획 및 보완대책’을 서둘러 발표하고 1989∼91년간 총 243개 품목의 수입자유화 계획을 GATT에 제출한다. 1985년 우리의 일방적인 쇠고기 수입금지조치는 GATT의 쇠고기 패널과 BOP 졸업을 불러왔고, UR 농업협상과 쌀시장개방 등 GATT 발 ‘개방화’라는 초대형급 태풍으로 이어졌다. 국제무역질서에 어두웠던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글로벌 개방시대를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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