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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9>민주화·개방화에 대응한-(2)1987년 12월 대통령 직선제로 포퓰리즘적 정책선택이 시작되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새만금 사업에 9700억 원을 투입하여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완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의도의 140여 배가 넘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대역사(大役事)가 된 새만금 간척사업의 험난한 여정은 노 후보의 포퓰리즘적인 정책 결정으로 시작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0월 유신으로 직선제가 사라진 후 15년 만에 되찾은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거였다. 대선정국은 여당 후보(민주정의당 노태우)와 야 3당 후보(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신민주공화당 김종필)가 격돌하면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선거에 대해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지는 2019년 7월 20자에 자신들이 입수한 1987년 대선 직전인 11월 23일 자로 작성된 미 CIA(중앙정보국) 정보문건을 공개했다. 모닝포스트 지는 당시 “여당 간부들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전망을 놓고 분열했으며, 패배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1987년 대선정국이 그만큼 예측불허였다는 점을 말 해 준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노태우 후보의 득표에 도움이 되는 표퓰리즘적(대중영합주의적) 정책공약들을 쏟아냈다. 정부는 1987년 12월 9일 ‘농어촌경제활성화종합대책’, 12월 11일에는 ‘새만금 간척사업’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12월 9일에는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전후협)’가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했다.

9년 전인 1978년 2월 경제기획원은 국내 물가 안정을 이유로 ‘농산물 수입자유화 기본방침’을 확정하고, 1978∼1991년 일부 농수산물에 대한 수입을 자유화했다. 이로 인해 1978년 가뭄과 1980년의 냉해로 인한 대흉작이 발생하면서 쌀을 비롯한 고추, 마늘, 양파, 참깨, 돼지고기, 쇠고기 등의 수입이 증가하면서 국내 농산물 가격이 하락하고, 농업소득의 감소로 농가 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정부는 1983년부터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복합영농 사업’을 추진하면서 육우 입식 사업도 함께 추진했다. 그러나 과도한 입식으로 1984∼1985년간 소값 폭락으로 소 파동이 발생하고 농가 부채가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자 정부는 1986년 3월 ‘농어촌종합대책’과 1987년 3월 ‘농어가부채경감대책’을 수립 농어가 부채감면을 추진했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농가 부채탕감’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농가 부채는 뜨거운 정치상품이 되었다. 여당의 노태우 후보는 선거 직전 ‘농어촌경제 활성화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농어가부채감면을 약속했다. 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부는 1989년 12월 30일 ‘농어가부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 공포하고 부채감면을 추진했다. 이후 농가 부채 감면(혹은 탕감)은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인기 정치상품이 되었다.

한편 ‘새만금’이란 말은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金)제와 만(萬)경 평야’를 합친 만큼의 ‘만금(萬金)의 새 땅’을 조성한다는 뜻으로 1987년 11월 2일 당시 황인성 농림수산부 장관이 처음으로 검토 중인 ‘서해안 간척사업’을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고쳐 부르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북 출신의 황 장관은 1987년 5월 12일 서해안 시대의 전진기지 조성을 위해 전라북도의 군산과 부안 일대에 총 33.9Km의 방조제를 쌓아 농경지와 공업단지 부지로 총 4만 2000ha의 새로운 간척지를 조성하는 구상을 발표했다. 농림수산부는 1987년 7월부터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추진했고 3개월 후인 10월 17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타당성 조사결과를 보고하자 대통령이 검토를 지시했다. 11월 2일 정인용 경제기획원장관 주재로 열린 관계부처 장관회의는 새만금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며 그 대신 ‘인천∼목포 간 서해안 고속도로’와 ‘군(산)ㆍ장(항) 광역산업기지’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당시 노태우 후보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새로운 서해안 시대를 대비한 개발 전략'이란 선거공약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새만금 간척사업 탈락에 반발하는 전북지역 여론이 비등해지자 12월 10일 전주를 찾은 노태우 후보는 기자회견을 열고 새만금 사업추진을 선거공약으로 발표했다. 농림수산부는 다음 날(11일) 기자회견을 열고 새만금 사업에 9700억 원을 투입하여 1989년부터 착수하여 1996년까지 완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의도의 140여 배가 넘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대역사(大役事)가 된 새만금 간척사업의 험난한 여정은 노 후보의 포퓰리즘적인 정책 결정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는 2017년 12월 7일 가진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이종찬 전 국회의원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이종찬의원은 축사에서 자신이 한농연의 창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1981년부터 전두환 정부의 농어민후계자 육성사업으로 선발되어 지원을 받아온 5만여 명의 후계자를 회원으로 하는 전후협이라는 이름의 농어민단체가 1987년 12월 9일 부랴부랴 창립총회 (초대회장 이기홍) 를 열고 새로 출범했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1주일여 앞둔 상황에서 민주정의당 중진의원으로서 노태우 후보를 지원하고 있던 이종찬의원의 지원을 받아 출범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후협은 출범 당시에는 ‘노 후보 지원 단체’라는 의혹(?)을 받았다. 그러나 전후협은 1990년 제2대 이경해 회장이 우루과이 라운드(UR) 농업협상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그해 10월 UR 협상이 열리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의 GATT(가트. General Agreement on Tariff and Trade,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를 방문한 자리에서 할복자살을 기도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농어민단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96년 제6대 엄홍우 회장 때 명칭을 현재의 ‘한농연’으로 개칭하면서 후계자를 넘어 한국농업의 미래를 책임지는 농어업경영인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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