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사실 그 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공부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던 터였다.… 가정형편이 좀처럼 풀려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대학진학은 가정에 부담을 주고, 특히 어머니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공부를 한다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대학진학을 앞둔 고3은 잠시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끈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 잔인한 계절이다. 살아가면서 해야 할 평생의 업(業)이 될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고 대학에 무사히 진학할 때까지 나와 부모님, 담임 선생님이 함께 치르는 산고(産苦)의 날들이 이어지면서 때로는 서로 부딪치기도 한다.

당시 나에게는 고민 아닌 고민이 하나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고3 동기생 대부분이 그랬다. 우리 때는 중·고등학교 입시 때만 되면 시험제도가 바뀌면서 무시험으로 진학하여 입시에 대한 경험부족으로 긴장감이 덜했다. 학교에서는 고3들만 강당에 모아놓고 긴장감을 갖고 공부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그러셨다. 

1963년 여름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버지가 낮잠에 빠진 나를 깨우시더니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정신상태가 흐리멍덩하다며 공부 그만두고, 대학진학도 포기하라고 언성을 높이셨다.  순간 나는 화가 폭발했다. 그동안 아버지로부터 비슷한 지적을 받은 탓도 있었지만 내 마음에 쌓여 있던 아버지에 대한 이유 없는 반항심이 터져 나왔다.

나는 공부도 대학진학도 다 치우고 집을 나가겠다고 소리치며 대들었다. 아버지 앞에서 책상의 책들을 모두 마당으로 내던지고 불을 지르겠다고 했다. 중3때 아버지가 내 공부태도를 나무라시면서 책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고 야단치신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더욱 화를 내셨고 나는 맞섰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아버지와 나를 말리는 소동은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할머니는 가끔 내가 서너 살 무렵 아버지에게 대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셨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어느 날 가족들이 외출하면서 나를 데리고 갈 데가 아니었던지 아버지는 나를 떼어놓으려 하셨고 나는 한사 코 따라가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래도 떼어놓자 나는 마당가운데 빨래 줄에 표백하기 위해 널어놓은 광목을 잡아 당겨 흙탕물에 넣고 질근질근 밟아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화가 나신 아버지가 나를 매질 하셨고 할머니가 아이 잡겠다고 말리셨다고 한다. 옆에서 지켜보셨던 할머니는 그래도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하더라 면서 그 때 일을 들려주셨다. 그 날 이후 두 번째로 아버지에게 대든 것이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집을 나가겠다며 옷가지를 챙겨 가방에 넣는 나를 말리시며 어디서 아버지를 이기려 하느냐고 나무라시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라고 종용하셨다. 집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 결국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이번 대학입시는 나에게 주어진 기회이니 시험을 보겠다면서 시험에 실패하면 대학진학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날 나는 스스로에게 배수진을 쳤던 것 같다. 아버지는 기회는 이번 단 한번 뿐이라면서 나에게 다짐을 받으셨다.  

사실 그 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공부를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던 터였다. 고등학교 2학년 후반에 접어들어 대학진학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정형편이 좀처럼 풀려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대학진학은 가정에 부담을 주고, 특히 어머니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공부를 한다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대학 입학원서를 써야 하는 시간이 코앞에 닥쳤다. 학교성적이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낮은 것도 아닌 중상을 넘는 다소 애매한 수준이었다. 어머니와 담임 선생님은 지원을 하면 내 실력으로 합격할 만한 대학이나 학과보다 조금 낮은 대학과 학과를 찾으셨다. 나에게는 적록색약이란 유전적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문과계열 가운데서 내가 무난히 합격할 만한 학과를 찾아야 했다. 담임은 고심 끝에 나를 위한 맞춤형 학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경제학과’를 어머니께 추천했다. 담임은 내가 적록색약이란 이유로 농경제학과라는 내가 처음 들어보는 학과를 찾아내셨고 이로 인해 우리 농과 운명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인생의 진로를 결정짓는 것과 같은 일생일대의 선택이 무슨 거창한 이유만으로 정해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담임은 어머니에게 농경제학과는 내 실력이면 거뜬히 합격할 수 있는 학과라는 점을 강조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담임과는 다른 생각으로 그의 추천을 반기셨다. 아버지는 농대에서 식량부족과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을 돕는 공부를 하고 사회에 나가 그들을 위해 일하며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라며 좋다고 하셨고, 한편 어머니는 농촌운동을 하다 요절한 외삼촌의 못다 이룬 뜻과 외삼촌의 권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업지도원 교육을 받고 심훈이 쓴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용신 같이 되고자 하셨으나 결혼으로 이루지 못한 그 꿈을 내가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반기셨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가족 누구도 농대 농경제학과를 반대하거나 다른 대안을 찾아보자는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고3때 장래 무엇이 되겠다는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갖지 못하고 있었고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도 모른 채 모두가 좋다고 하는 서울대 농대 농경제학과에 원서를 제출했다. 원서를 접수하고 받은 수험표에 적힌 수험번호가 1234번이었는데 그 번호가 너무 마음에 들어 합격은 걱정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학과 모집정원 25명에 5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원해 20:1이 넘는 경쟁률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대학 합격 전보를 받으신 아버지는 ‘양부야 수고했다. 그래, 해 냈구나. 장하다’ 하시면서 무척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셨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