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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7> 전환시대의 경제 논리와 개방농정을 비판하다-④새마을운동은 농촌연구를 위해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우농(愚農) 최양부

새마을운동연구는 귀국 후 내가 수행한 최초의 농촌연구가 되었다. 나는 현장감을 갖기 위해 곧바로 농촌을 찾았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농촌은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였다. 마을은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지도자와 지방공무원들과 농협 임직원들이 있었다.


1978년 4월 1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연구원’)이 새로 출범하면서 연공서열이 아닌 박사학위 소지 여부를 기준으로 새로운 인사질서가 만들어졌다.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수석연구원으로 연구실장 발령을 받았다. 오호성, 주용재, 김영식, 성배영, 정찬길 박사 등 선배들과 함께 수석 발령을 받았으나 그들 가운데 막내였다. 박사학위가 없는 선배들 사이에서는 ‘최 박사 밑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으냐’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수석연구원들 가운데도 내가 그들과 동급으로 수석과 실장이 되는 것을 불편해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어떤 선배는 내 군대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실제로 군필자에 대해서는 가산 호봉이 매겨졌다. 김동희 부원장은 선배들과 차별화하여 내 발령 일자를 늦추었고 초임 호봉도 낮추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모두 선배들뿐인 실장 회의나 세미나 석상에서 선배들의 의견이나 발표에 대해 내가 의견을 말하면 선배들이 불편해하거나 나를 ‘선배도 모르는 버릇없는 후배’라고 하는 것이었다. 선배들 앞에서 다리를 꼬고 있다며 ‘건방진 X’라고도 했다. 나는 연구자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참여하는 미국대학의 토론문화에 익숙해져 있었고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 세계에서는 선후배를 떠나 모두가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열린 토론을 좋아하는 나는 선후배를 의식하여 토론을 삼가는 것은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나의 토론과 비판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화를 내며 나를 견제하는 선배들이 생겨났다. 나는 운명적으로 선배들과 경쟁하고 갈등하며 선배라는 가시나무 숲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30대 초의 혈기방장하고 기고만장했던 오기와 치기도 있었지 않았나 하는 자성의 마음이 든다. 그때 본의 아니게 나의 비판 때문에 힘들어했을 선후배들에게 새삼 미안하고 죄송할 뿐이다.

수석연구원들은 각자의 전공과 관심에 따라 연구 분야를 선택했다. 농업경제 분야는 선배들이 나누어 맡았고 나머지 농촌경제사회 분야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내가 바라던 데로 되었다. 선배들 가운데 농촌연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연구영역과 과제 선정을 놓고 경쟁하거나 그들의 간섭을 받을 소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농촌경제사회개발연구에 관한 한 나는 그들의 관심밖에 있었고 마음껏 연구과제를 구상하고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농촌경제사회발전연구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나는 사회과학으로서 농업경제학은 농업이란 경제 활동의 주체인 농민(농가)의 경제적 의사결정과 행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들의 생산 활동인 농업과 그들의 삶의 공간인 농촌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농업·농촌·농민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업경제학이 기능적으로 ‘농업’에만 붙잡혀 ‘쌀의 경제학, 소, 돼지의 경제학’, 또는 ‘토지 경제학’ 등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농업경제학도 모든 사회과학처럼 농민 중심의 사람의 경제학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관련된 농촌경제사회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촌은 미답(未踏)의 땅이었고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나 농촌연구의 출발점이 새마을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연구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1970년부터 국가적 농촌(마을)개발 운동으로 거국적으로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정권이 농촌자원을 총동원하여 추진한 농민·농업·농촌 정책이자 농정 그 자체였다. 박 정권은 1962년 이후 추진한 경제 성장정책이 산업적, 지역적 편향성이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도농(都農) 간 성장과 소득 격차를 치유하기 위해 1970년대에는 농업·농촌·농민 정책을 강화했다. 새마을운동과 주곡자급운동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추진되었던 1972~1977년간은 미국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의 모든 것이 나에게는 생소했다.

나는 1977년 8월 국립농업경제연구소 복직과 함께 성배영 박사가 주관하고 있던 세계은행(IBRD) 차관사업 새마을운동평가연구 가운데 ‘농촌 새마을운동의 사회적 평가연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미국유학 기간 5년간 우리 농촌에서 일어난 변화의 실상부터 알아야 하고 새마을운동부터 공부하라는 김성호 소장의 권유와 배려 때문이었다. 새마을운동연구는 귀국 후 내가 수행한 최초의 농촌연구가 되었다.

나는 현장감을 갖기 위해 곧바로 농촌을 찾았다. 5년 만에 다시 만난 농촌은 상전벽해라는 말 그대로였다. 마을은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지도자와 지방공무원들과 농협 임직원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만나 지난 5년간 마을에서 일어난 지붕개량이며 마을 안길 넓히기, 마을 진입도로 확장, 주곡자급을 위한 증산 운동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이 그들을 새마을운동에 나서게 했는지, 운동의 궁극적 힘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유신 독재 권력이 거국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고 평가한다는 것 그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는 새마을운동이란 농촌근대화운동을 어떻게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하는가?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기 위한 적절한 연구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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