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급진적 개방농정은 농정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고 농민들의 개방농정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더욱 거세졌다.…급격한 산업화와 개방화의 충격으로 해체되고 어려움을 겪는 우리 농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발전전략의 개발과 설계는 당면한 시대적 농정과제가 되었다.


1980년 12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처음 추진한 ‘80년대 새 농정방향의 구상(새 구상)’은 시작단계에서 중단되었으나 연구원이 1978년 출범 2년 반여 만에 처음으로 정부의 개방농정과 증산농정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독자적으로 새로운 농정 플렛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새 구상은 농정의 중심을 품목(주곡 증산)에서 농가(농민) 즉, 사람으로 전환하고, 전업농가육성을 비롯한 농가 유형별 발전전략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농정의 영역도 처음으로 농업 중심에서 농민·농촌과 국민 식품으로까지 확장했다. 당시에는 비록 비현실적이란 비판을 받았으나 80년대 산업사회화하고 개방화하고 있는 나라 현실에 부응하여 농정전환의 새 방향과 농정과제를 제시한 농정사적 의미가 있는 최초의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81년 당시는 새로 출범한 서슬 퍼런 신군부의 청와대와 경제기획원과 이에 저항하는 농수산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연구원이 개방농정과 증산농정을 비판한 것은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김보현 당시 원장은 1998년 연구원 출범 20주년을 회고하는 글에서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내용이 정부 시책에 거슬릴 때는 적지 않은 질책과 비판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연구원의 자율성과 자주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정부 출연연구기관이란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한계를 조절하는 데 연구원의 고민이 있다. 그러나 옳다고 믿은 견해는 관철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술회했다. 새 구상은 세상의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으나 당시 만든 ‘80년대 새 농정방향의 구상-한국농촌경제의 기본문제와 대책’이라는 이름의 소책자(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정책협의회 시리즈 6, 1981.1)가 그때의 치열했던 양비론적 비판과 새로운 대안 농정제시의 용기를 증언하고 후폭풍의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경제 대통령’이 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을 정점으로 하는 경제기획원의 경제 안정화 팀은 1982~83년간 한자리 이내 물가인상을 정책목표로 1981년 추곡 수매가격 인상률을 농수산부가 주장하는 24%로 하라는 정치권의 공세를 잠재우고 14%로 억제했다. 이중(二重)곡가제로 인한 양곡 특별회계적자 해소를 위해 1982년부터 제로 베이스 예산편성을 주장하며 세출예산증액 억제에 나서 1983년도에는 추곡 수매가격을 동결하고 1984년도 예산을 동결 조치하기도 했다. 1983년 5월 정부는 ‘80년대 산업정책의 과제와 지원시책 개편방안’을 통해 1984년부터 쌀과 보리를 제외한 모든 농식품의 수입 관세를 철폐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개방농정의 저곡가정책과 수입자유화정책 추진의 갈등 속에 발생한 1978년 벼 ‘노풍’ 피해와 가뭄으로 인한 흉작은 개방론자들의 주장대로 고추, 마늘, 양파를 비롯한 참깨, 땅콩 등과 쇠고기 등 농축산물 수입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0년에는 사상 초유의 대흉작을 가져온 벼 냉해 피해로 쌀 생산량이 예상수확량(4200만섬)의 절반 수준(2500만섬)으로 격감하자 외국쌀을 대량으로 수입하게 되면서 어렵게 구축한 주곡자급 기조마저 흔들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자연재해로 인한 농산물 수입 확대는 농산물가격 하락을 가져왔고 고스란히 농가 부채 증가를 이어졌다. 호당 농가 부채는 1977년의 8만2000원에서 1980년 33만9000원, 1983년 128만5000원으로 급증했다. 농민들은 개방농정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으며 정부에 부채감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김 수석이 주도한 급진적 개방농정은 농정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고 농민들의 개방농정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더욱 거세졌다.

개방농정을 둘러싼 갈등은 김재익 수석 재직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내 농촌 지역 출신 정치인들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1980년 쌀 대흉작과 1981년 대규모 외미 도입을 들어 식량안보를 강조하며 주곡자급을 위한 증산정책의 지속적 추진과 농가 부채대책수립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 농수산부는 이런 정치적 분위기를 타고 1981년 쌀 증산 7개년계획(1981~87)을 다시 수립하고 주곡 증산 농정을 이어갔다. 개방농정은 날로 격화되는 농업계와 농민의 저항과 정치권의 비판 속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개방농정에 대한 비판과 궤도수정요구가 고조되고 있던 1983년 10월 9일 김재익(金在益, 1938~1983) 수석이 북한 공작원이 자행한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하고 후임으로 한국개발연구원(KDI) 사공일 박사가 청와대 경제수석에 취임하면서 개방농정은 새 국면을 맞게 된다.

그러나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김 수석이 주도했던 전환기 농정 7년(1977~1983)의 개방농정은 농경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으며, 증산농정의 한계를 일깨우고 도시산업사회와 개방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조기 경보이기도 했다. 급격한 산업화와 개방화의 충격으로 해체되고 어려움을 겪는 우리 농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발전전략의 개발과 설계는 당면한 시대적 농정과제가 되었다. 1980년대를 향한 새 농정구상의 도전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1982년부터 새 구상에서 제시했던 새로운 농정과제들, 농가 유형별 특성에 따른 농가발전전략, 산업사회의 새로운 농촌개발전략, 농외소득증대와 농촌공업개발방안 등을 중심으로 우리 농정의 기본 틀을 바꾸고 전략을 새로 짜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나 유용한 결과를 얻기까지는 우리 농의 현실에 대한 더 많은 공부와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