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1982년 8월에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8차 세계농업경제학회에 참석했다.…세계농업경제학회는 학술 활동과 함께 학자들 간의 교류와 친분을 쌓는 자리다. 학회 기간 중 미국과 유럽학자들이 미국학회, 유럽학회 등으로 따로 모이는 것과는 달리 아시아 출신 농업경제학자는 그런 모임이 없어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2019년 3월 4일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손자(이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매주 2∼3회 손자의 하교 후 생활을 돌본다. 손자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으나 외양간을 뛰쳐나온 송아지처럼 이리저리 뛰는 손자를 뒤쫓는 일은 만만치가 않다. 하교하는 손자를 만나 같이 놀다 피아노학원에 보내놓고 주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문득 34년 전인 1985년의 일을 떠올렸다. 마흔이 되던 해 아들(수영)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들이 1978년생이니 올해로 41살이 되었고 그의 아들이 올해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아들과 딸(인영) 입학식도, 하교 후 생활도, 졸업식도 함께 해본 기억이 없다. 자식들이 학교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졸업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식들을 위해 한 일은 고작 해외 출장길에 선물을 사다주거나 여름 방학 중 2∼3일간 물가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손자를 돌보면서 자식들과는 스킨십 한번 제대로 따뜻하게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뒤돌아보면 그때는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생각은 온통 농촌정주생활권과 산업사회 농정에 붙잡혀 있었다. 집은 하숙집이었고 아이들 육아와 교육문제, 가정경제 일체는 아내에게 맡기고, 나는 농촌현장으로, 연구원으로, 밖으로 나돌았다. 그때 자식들에게 못했던 것들을 몰아서 손자에게 한다는 생각에 이것도 인생의 업보(業報)란 생각이 든다. 아무 탈 없이 잘 자라 제 할 일하는 자식들이 새삼 고맙고, 무거운 짐을 혼자 감내해온 아내(조권희)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1978~85년간은 참으로 세상과도, 정치와도 담을 쌓고 연구 생활에만 빠져있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난 것도, 많은 광주시민이 희생당한 것도 고등학교 동창 전화를 받고 뒤늦게 알았다. 무심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항상 친구와 희생당한 광주시민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짬짬이 시간을 내어 대학에도 출강했다. 대부분 우연한 기회에 출강 요청을 받고 출강하게 되었다. 1981년 연세대 박기혁 교수로부터 대강(代講) 요청을 받고 경제학과에서 ‘농업경제학’ 강의(1981.9-1984.6)를 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에는 서울대 농경제학과 심영근 교수로부터 통계학 강사가 출강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대강 요청을 받고 당시 학부 2학년 학생들에게 ‘농업경제통계론’를 강의(1982.3-6)했다. 그때 ‘통계로 거짓말하기(How to Lie with Statistics?)’란 대럴 허프(Darrell Huff)의 책을 교재 삼아 ‘통계 인문학’ 강의를 했던 기억이 생각난다. 1985년에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임종철 교수와 우연히 박사학위 논문 이야기를 하다 그의 요청으로 ‘경제철학론 서설’을 강의(1985.9-1986.12)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공부했던 칼 포퍼(Karl Popper)의 과학철학,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적 지식 혁명을 가져온 ‘패러다임 전환 (paradigm shift)’이란 개념을 소개하고, 주류경제학인 신고전경제학의 인식론과 과학철학적 기초에 대해 강의했다. 고려대 대학원 농업경제학과에서 ‘농업경제학연구방법론’을 강의(1985.9-1986.12)한 것이 마지막 출강이었다. 나는 대학에 출강하면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현장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목격했다. 그때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민족’과 ‘사물놀이’ 등 ‘우리 것’을 앞세우며 ‘국수(國粹)주의’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주체사상’도 공부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북의 ‘남조선 혁명론’에 빠져 대한민국 체제전복의 꿈도 꾸고 있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해봤다.

1982년 8월에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18차 세계농업경제학회에 참석했다. 농업경제학도라면 한번은 참석해보아야 하는 세계학술대회다. 나는 당시 학회 회장이었던 데오도르 담스 교수(독일)가 주관하는 ‘농촌발전과 농촌공업개발’을 주제로 하는 특별회의에 한국 사례발표자로 초청받았고, 동시에 학회 첫날 열린 전체회의에서 비 제이 비아스(V.S.Vyas) 교수(인도)의 ‘아시아 농업의 성장과 형평’이란 기조 발제 논문 지정토론자로 초청받았다. 1982년 제18차 세계농업경제학회를 시작으로 19차(1985년, 스페인 말라가), 20차(198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21차(1991년, 일본 도교) 회의에 연달아 참석하는 동안 아시아와 미국, 유럽 출신의 농업경제학자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세계농업경제학회는 학술 활동과 함께 학자들 간의 교류와 친분을 쌓는 자리다. 학회 기간 중 미국과 유럽학자들이 미국학회, 유럽학회 등으로 따로 모이는 것과는 달리 아시아 출신 농업경제학자는 그런 모임이 없어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나는 1985년 19차 스페인 학회에서 학회 기간 중 발행되는 신문에 점심시간을 이용 아시아 지역에서 온 학자들끼리 점심 먹으며 하는 ‘런치 백 모임’을 하자는 광고를 냈다. 정해진 날 유지로 하야미(일본), 비 제이 비아스 등 20여 명의 학자가 모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도 학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는 ‘학회창립준비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다음 학회에서 학회설립안(案)을 보고하기로 했다.

1988년 20차 아르헨티나 학회에서 ‘아시아농업경제학회(Asian Society of Agricultural Economists, ASAE) 창립구상(안)’을 발표했다. 나는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199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21차 학회에서 아시아학회 창립을 공식 선언했다. 첫 번째 학술대회는 1993년 8월 서울에서 열기로 하고 그때까지 학회는 잠정적으로 내가 책임 맡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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