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개방농정은 신군부의 농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농업계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나는 김재익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 주도하는 급진적인 개방농정과 농수산부의 강압적인 증산농정을 비판하는 한편 80년대 산업사회와 개방시대를 향한 새 농정 비전을 개발하여 논리를 세우고 정책을 설계하는 작업에 빠져있었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77년 8월부터 1981년까지 4년여 동안 나라는 18년간의 박정희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는 대 격변기였다. 나라는 급격한 산업화와 개방화로 농경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산업사회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었다. 개방농정과 증산농정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함성이 높아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열망 가운데 80년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1977년 11월 6일. 3년의 열애 끝에 결혼한 신혼생활에 마음껏 취해보지도 못한 채 밀려드는 전환기 농정과제와 우리 농(農)의 현실 사이에서 농민의 소리를 들으며 미국유학으로 생긴 5년간(1972~1977)의 공백을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날밤을 새웠다. 농민에게 유익한 농정연구자가 되기 위한 영혼을 찾는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1978년 4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출범하기 전 국립농업경제연구소에서 받은 농업연구사(국가공무원) 월급은 10만 원 수준으로 신혼살림 꾸리기에도 벅찼다. 그러나 연구원 출범 후 수석연구원이 되고 월급이 40만 원대로 오르고 아파트도 3년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생활이 안정되었다. 특히 모친께서 내 몫으로 마련해 놓으신 조그마한 아파트가 큰 살림 밑천이 되었다. 모친은 미국유학 중 매달 2만5000원 정도 나오는 내 월급(본봉)을 5년 동안 모두 모아 당시 도봉구(현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3층 연립주택에 24평형 아파트(전세 포함)를 장만해 놓으셨다. 아내는 살림을 시작한 날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고 매월 저축목표액을 제외하고 남은 돈은 지출항목별로 별도 봉투에 담아 놓고 그만큼만 썼다. 아내는 평생을 근검절약과 저축으로 살림 기반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렇게 가정을 만들어가는 사이 나는 어느덧 두 아이(78년생 아들 수영과 80년생 딸 인영)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는 아이들 양육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미국행을 포기하고 박사 과정 공부도 중단했다. 아내가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저녁준비를 하다 손가락을 크게 베었다. 다섯 바늘을 꿰매야 할 정도로 상처가 깊어 마취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에도 태아를 생각하여 주사 맞기를 거부했다. 아내가 생살을 꿰매는 고통을 참는 강인한 모성을 보면서 아내에 대해 무한한 감사와 믿음을 갖게 되었다. 육아와 가정경제에 관한 한 아내의 판단을 존중하고 그의 뜻을 따랐다. 아내는 매일 아침 출근하는 나를 위해 따뜻한 아침밥상을 차려 격려해 주었다. 아내는 내가 농정연구자로서 연구에만 집중하고 한 점 부끄럼 없이 학자적 자존심과 양심을 지키며 내가 해야 할 바를 흔들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내 정신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1979년 8월 대한민국 역사의 진로를 바꾼 YH 사건이 일어났다. YH 무역의 여성 근로자들이 회사폐업에 항의하며 야당인 신민당 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의 강제진압에 항의한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을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제명하자 일어난 10.16 부마(부산·마산) 민주항쟁 진압문제로 권력 내부의 의견충돌이 일어났고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면서 유신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그러나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1980년 5.17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 등을 체포하자 일어난 5.18 광주 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79~80년 나라를 뒤흔드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나의 관심은 온통 1978년 이후 줄기차게 개방농정을 외치며 추진해온 김재익 국장이 신군부의 경제정책 실세가 되어 청와대로 들어간 것에 꽂혀있었다. 개방농정은 신군부의 농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농업계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나는 김재익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 주도하는 급진적인 개방농정과 농수산부의 강압적인 증산농정을 비판하는 한편 우리 농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80년대 산업사회와 개방시대를 향한 새 농정 비전을 개발하여 논리를 세우고 정책을 설계하는 작업에 빠져있었다. 틈틈이 연세대 경제학과(농업경제학)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경제철학) 등에 출강도 했다.

1980년 11월 나는 경제과학심의회의(‘경과심’)에 파견근무를 나갔다가 다음해 10월 말 경과심 해체로 복귀했다. 1981년 3월에는 독일 서베를린에서 열리는 ‘동남아 협동조합법 세미나’에 참가했다. 갑작스러운 파견근무였고 세미나 참석이었지만 모두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경과심 근무는 경제기획원, 재무부 등에서 파견 나온 고위 공직자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국가적 거시경제 틀 속에서 우리 농정을 보고 시야를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나는 경과심에서 장덕진 의장(장관급)의 원철희 비서관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의 운명적 만남은 13년 후로 다시 이어졌다. 1994년 대통령 농수산수석비서관이 된 후 다시 만나 농협중앙회장 선거와 농협개혁, 특히 농협중앙회 도매물류센터 건립과 주식회사 농협유통 설립, (사)농식품신유통연구회의 창립과 운영 등 24년째 합력하고 있다. 1981년 우연히 참가한 협동조합세미나에서는 독일의 협동조합 권위자 한스 뮨크너(Hans-H. Munkner) 교수의 협동조합론 강의를 들었다. 그때 들은 강의가 1994년의 농협개혁과 2007년부터 2015년까지 8년간 ‘농협제자리찾기와 농협바로세우기’ 등 농협개혁 운동을 하면서 농협개혁의 원칙과 방향을 잡는 내 정신의 힘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인생의 길은 알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이 이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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