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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5>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길을 찾아 나서다-②대한민국, 북한 대남 무력도발 속 다시 독재의 길을 걷다
   
 

우농(愚農) 최양부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이 터져 나오면서 언론계는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시작하고, 대학가는 교련철폐와 민주 수호운동에 나서고, 교수들은 대학자주화선언을 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농촌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 대학원에 진학하고 농업경영연구소에 출근하면서 새 희망으로 부풀어 있을 때 나라는 북한의 대남무력도발로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북한은 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를 남파했다. 청와대 기습을 위해 세검정 자하문 부근까지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경찰에 적발되어 30명이 사살되고 1명은 월북하고 1명은 생포되었다. 1월 23일에는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를 동해에서 납치하고 미군 83명을 억류했다. 11월에는 울진·삼척에 130명의 무장공비를, 1969년 4월에는 주문진에 무장간첩을 침투시켰으며, 12월에는 KAL기를 납치하고 승객 등 51명을 억류했다. 계속되는 북의 대남, 대미 무력도발로 남북과 미북 관계는 6.25 전쟁 이후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이처럼 한반도 안보 상황이 위중한 때인 1969년 7월 미국 닉슨 대통령은 후에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으로 알려진 미국의 새 아시아 정책을 발표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으로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군사비 부담감축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시아 동맹국들의 자주국방 능력을 강화하면서 주둔 미군 규모를 감축하고 미군을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실제로 주한 미군 7사단을 철수시키고 미군 7000명을 감축했다. 미국의 갑작스러운 정책변화는 대한민국 안보 상황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북의 대남 도발과 안보환경변화에 대응한 자주국방체제 강화를 위해 1968년 4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 복무기간을 육군과 해병대는 6개월, 해군과 공군은 3개월 연장했다. 10월에는 육군3사관학교를 창설하고, 12월 말에는 주민등록제를 도입했다. 1969년부터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군사 교육 훈련(교련)을 시작했고, 1969년 3월에는 처음으로 대규모 군병력을 동원한 한미연합훈련을 전개했으며 1970년 말에는 전투경찰대를 신설했다.

북의 계속된 도발은 대한민국을 하루아침에 공안정국으로 몰아넣었고 박 대통령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 공작을 시작했다. 1968년 3선을 위해 차기 후계자로 떠오른 김종필을 제거하고, 야당인 신민당과 학생들은 물론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 내 일부 의원들의 3선개헌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1969년 9월 국회에서 대통령 3선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로 통과시키고 10월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3선개헌으로 장기집권의 장애물을 제거한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비판세력을 탄압하며 독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2년 10월에는 유신독재를 탄생시키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그 무렵 한국사회는 압축성장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70년 4월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사회경제의 실상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5월에 발표된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장군, 고급공무원’의 오만과 독선과 부정부패를 풍자적으로 고발하면서 사회적으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1월에 일어난 전태일 분신자살은 단순 저임 노동자들의 고달픈 실상을 알리고 노동운동을 본격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기득권에 대한 비판과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이 터져 나오면서 1971년 4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언론계는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시작하고, 대학가는 교련철폐와 민주 수호운동에 나서고, 교수들은 대학자주화선언을 했다. 그해 8월 현재의 성남시 수성구와 중원구 일대에 조성한 서울시 판자촌 철거민 이주 단지에서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은 농촌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갈등 속에 1971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후 오히려 독재정치를 더욱 강화했다. 12월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초 헌법적 조치를 단행했다. 1972년 10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대통령 권력을 제왕 수준으로 강화한 소위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11월 국민투표로 확정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다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국가적으로 안보 상황이 엄중했던 1968년 10월 나는 입영통지를 받고 광주(직할시)지역에 있는 31사단에 입소했다. 그러나 입영 전 신체검사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현역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대학 재학 중에는 신체검사연기를 받았고 1967년 4학년 때 병역판정신체검사에서 1을종(2급)을 받았다. 나는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지병에 대해 검사를 마친 군의관은 전남대학병원 전문의 검사를 받고 진단서를 제출하라며 귀가를 명했다. 그리고 1969년도에 최종적으로 병종(5급) 판정을 받고 ‘제2국민역(전시근로역)’에 편입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친구와 선후배들은 나에게 실망감과 배신감을 표출하고, 나를 말과 행동이 다른, 정의와 불의를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경원하고 질타했다. 현역으로 복무하는 동료와 선후배들에게는 더없이 미안했다. 그때 군 복무를 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내 인생에서 가장 당당하지 못한 유감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날 이후 ‘병역 미필’이란 네 글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내 몸에 찍힌 ‘회한의 주홍글씨’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참회하며 못다 한 나라에 대한 의무를 대신한다는 마음으로 대한민국과 농을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내가 해야 할 바를 다하는 바른 삶을 살리라 결심하고 그 이후 그런 마음 자세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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