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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8>산업사회의 새 농정을 설계하다-②농외소득-농촌공업개발 연구는 최초의 정책개발연구였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농외소득과 농촌공업개발 연구는 ‘연구를 통해 농민과 농촌발전을 위한 정책개발에 헌신하겠다’라는 1968년의 각오를 실천한 최초의 연구가 되었다.…1980년대 농외소득과 농촌공업개발은 아시아 국가들의 큰 관심을 받는 새로운 정책의제였다.


경제기획원이 1978년 10월경 의뢰한 ‘농외소득증대방안연구’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출범한 후 최초로 수주한 연구용역이었다. 나는 연구책임을 맡아 1981년 7월까지 3년 넘게 연구에 매달렸다. 농외소득개발은 농촌경제 활성화와 농가 취업 및 소득증대를 위해서 필요한 정책이라고 판단하고 실질적으로 농가와 농촌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책개발연구에 집중했다.

연구 1차연도(1978)에는 농가의 농외활동 개념과 이론적 틀을 정리했다. 농가가 소득증대를 위해 보유노동력을 동시에 농업과 농외활동을 위해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가 없고 어느 지점에서는 경합이 발생한다. 그 지점에서 농가는 노동력을 농업, 아니면 농외활동을 위해 투입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농가의 농외활동 정도에 따라 전업농, 겸업농(1종, 2종), 탈농(농업 포기) 등의 다양한 ‘농가 유형’이 생겨난다. 나는 ‘농가 유형론’의 관점에서 농외소득정책은 겸업이나 탈농을 희망하는 농가의 소득증대를 위한 정책이며 농업소득에 의존하는 전업농가를 위한 정책으로는 매우 제한적 이란 점을 논리적, 실증적으로 설명했다. 농가 유형론은 그렇게 해서 처음 생겨났고 이후 우리 농정의 농가발전을 위한 정책적 개념 틀로 자리 잡게 된다.

연구 2차연도(1979)에는 농촌 소재 공장과 서울 등 대도시 소재 이전대상 공장들의 실태조사연구 통해 농촌공업개발정책 방향과 제도 정비방안을 연구했다. 연구 3차연도(1980)에는 농가의 농촌공장취업 가능성을 조사하고, 농촌 부업단지 실태조사를 통해 농가의 농외사업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하여 농가 부업육성방안을 수립했다. 마지막 4차연도(1981)에는 농촌직업훈련기관의 현황과 문제점을 조사하고 농민들의 직업훈련 강화방안을 정리했다.

1981년 7월 그동안의 연구결과들을 정리한 ‘농외소득정책의 기본문제와 새로운 접근’이란 정책보고를 통해 농외소득정책은 농업소득정책과는 목표와 대상, 추진상의 시차 등이 서로 다른 정책이며, 농가 유형론에 따라 농외사업이나 취업 또는 탈농을 희망하는 농가를 위한 정책임을 강조했다. 농외소득개발 촉진을 위해서는 농업구조개선, 농촌인력개발, 농촌공업육성 및 유치, 농공단지 개발, 농촌 도로개발 확충 등의 정책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농수산부, 상공부, 내무부 등으로 분산된 관련 정책의 범정부적 통합조정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경제기획원은 우리의 정책 건의를 수용하고 1981년 9월 ‘농외소득원개발기획단’을 만들어 관계부처 간 협의를 시작했다. 기획원은 1982년 9월 23일 ‘농가소득증대를 위한 중점시책’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1983년 6월 ‘농어촌소득원개발촉진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12월 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1984년부터 범정부적으로 농촌공업개발을 위한 농공지구(단지)조성과 농어촌 부업단지와 농산물가공공장 육성. 관광농업개발 등을 위한 정책추진을 시작했다. 농정사상 처음으로 농촌 가내 전통수공업품 기술개발을 지원하고 판로개척을 위해 ‘농가공산품판매센터’를 개관하고 ‘관광농업개발’을 위한 정책을 도입했다. 이후에도 연구원은 ‘농어촌소득원개발촉진을 위한 정책협의회’를 개최하는 등 농외소득과 농촌공업개발정책 지원을 계속했다.

농외소득과 농촌공업개발 연구는 ‘연구를 통해 농민과 농촌발전을 위한 정책개발에 헌신하겠다’라는 1968년의 각오를 실천한 최초의 연구가 되었다. 1978년 10월경부터 농외소득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이용만, 김수욱, 김형모, 박수일, 서종혁, 김태명, 윤석원 연구원 등과 이중웅 박사, 그리고 1981년부터는 이동필 연구원이 연구에 합류했다. 특히 1970년 나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농경제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마친 서종혁은 1978년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농외소득연구팀에 합류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1980년 그를 미주리대학교 농업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추천하고 그의 미국 유학을 도왔다. 이동필은 1988년 나의 추천으로 미주리대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농가 가내수공업, 농산물가공 등 농촌의 소규모 가내공업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으며, 1992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나의 권유대로 연구를 계속하여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고 농식품부 장관재직 중에는 ‘농가 유형별 맞춤형 농정과 농업의 6차 산업화’를 주창하고 실천에 앞장섰다.

1980년대 농외소득과 농촌공업개발은 아시아 국가들의 큰 관심을 받는 새로운 정책의제였다. 1980~85년간 나는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등지에서 열린 농촌공업개발 국제세미나, 전문가 회의 등에 초청받아 농가의 농외활동과 농촌공업의 개념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농촌공업개발정책 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1983년경(?) 나는 일본 동경대학교 농업자원경제학부 사부로 야마다(山田 三郞) 교수의 편지를 받았다. 농촌 공업화에 대해 나와 대화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출장길에 일본에 들러 야마다 교수의 동경대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내가 발표한 농외소득과 농촌공업에 관한 글들을 모아놓고 잘 읽었다며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박사과정에 있던 유영봉 조교의 도움으로 내가 한글로 쓴 글도 찾아보았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했다. 나는 그날 ‘세상에는 내가 쓴 글을 정독하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은 있다. 그 한 명을 의식하고 글을 써야 한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후 나는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글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을 생활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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