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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8>산업사회의 새 농정을 설계하다-⑮벼 이앙기와 수확기 개발은 아시아의 위대한 발명이었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M-사이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앙기와 수확기(콤바인) 개발은 한국 농기계인이 당면한 최대의 도전과제였다. 우리 농업은 1960년대 벼 신품종개발이란 ‘종자 혁명’에 이어 새로운 ‘농기계 혁명’이 요구되었다.


전통적인 아시아 답작(畓作) 사회는 산업화의 충격으로 농가인구의 탈농이촌이 시작되면서 농한기(겨울)에는 농업노동력이 유휴상태가 되고 대량의 계절적 잠재실업이 발생하고, 농번기(봄, 가을)에는 오히려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린다. 벼 이앙과 수확기에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는 M자형의 노동 피크(peak)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처럼 해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농업노동력 수요 급증, 급감 현상을 ‘M-사이클’이라고 칭했다. 나는 M-사이클의 존재 때문에 ‘아시아 답작 사회의 산업화를 위한, 농촌농업노동력의 도시공업부문으로의 무제한 공급은 농업노임의 실질적 상승 없이는 불가능하다’라며 이를 ‘M-사이클 함정’이라고 명명(命名)했다. 나는 1985년 한국경제학회 학술대회에서 아시아 답작 사회의 산업화를 위해서는 노동력에 의존하는 벼 이앙과 수확 작업을 대체하는 농업기계화로 M-사이클 함정에서 벗어나야 하기에 농업기계화 촉진은 아시아 답작 사회의 지속적인 산업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M-사이클 가설(假說)’을 발표했다. 그리고 농업기계화를 위한 연구기술개발, 농기계산업육성, 경지기반조성 등 기계화 인프라 구축을 위한 국가적 재정투융자확대의 정책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실 1960~70년대 산업화 충격으로 인해 계속되는 농촌 청장년층의 탈농이촌으로 우리 쌀 농업은 이미 1980년대 초부터 농번기에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모내기와 수확을 적기에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M-사이클 함정에 빠져 이로 인해 실질임금은 상승했다. 정부는 쌀의 안정적 생산을 위해 매년 농번기가 되면 임기응변식으로 범정부 차원에서 ‘농촌일손돕기운동’을 전개했다. 농번기에는 군인, 공무원, 학생, 직장인들은 농촌을 찾아가 모내기와 벼베기작업을 도와야 했으며 인력으로 하는 벼 이앙과 수확 작업을 대체하는 농업기계화는 절박한 국가적 지상과제로 부상했다. M-사이클은 농업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한편 수출주도산업의 대외 경쟁력을 약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M-사이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앙기와 수확기(콤바인) 개발은 한국 농기계인이 당면한 최대의 도전과제였다. 우리 농업은 1960년대 벼 신품종개발이란 ‘종자 혁명’에 이어 새로운 ‘농기계 혁명’이 요구되었다.

현실적으로 쌀 농업기계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와 함께 일본, 대만 등 산업화에 앞서나가고 있던 아시아 답작 농업 국가들의 공통 관심사였다. 밀과 보리 등 밭 농업을 하는 서구 전작(田作) 농업사회는 일찍부터 트랙터와 콤바인을 개발하여 기계화 일관작업체계를 확립했다. 그러나 아시아 답작 농업사회에서는 1950년대까지도 논 농업 조건에 적합한 벼 이앙기와 수확기(서구형 맥류 수확과 다른 벼 수확용 자탈형 콤바인)를 개발하지 못했다. 다만 벼를 재배하는 이탈리아가 1940년대 이전에 이앙기를 개발했으나 실용화하지는 못했다.

아시아 국가들은 쌀 농업 조건에 적합한 이앙기와 수확기를 스스로 개발해야 했고 이는 농기계인의 ‘아시아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요구되었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농기계개발에 나서 이탈리아의 경험을 참조하여 1955년경부터는 다양한 이앙기를 개발했다. 1960년대 말경부터는 이앙기 실용화에 성공하여 여러 형태의 동력이앙기와 수확기(자탈식 콤바인)를 생산 보급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벼 이앙기와 수확기의 개발과 실용화는 전적으로 일본 농기계인의 창의성이 낳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드높인 위대한 발명’이었다.

한국은 1969년경부터 농촌진흥청 농공이용연구소(1979년 농업기계화연구소로 개편했다. 현 농촌진흥청 국립과학원 농업공학부) 연구진들이 이앙기 개발에 착수, 일본의 다양한 동력이앙기와 수확기를 도입하여 우리 토양과 지형·지세 조건에 맞추어 적응시험을 하면서 현실에 맞는 농기계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 우리는 일본기술 덕분에 기계개발시간과 시행착오를 줄이며 부품을 빠르게 국산화하고 개량하여 순수한 우리 모델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한국농업기계화의 개척자인 대동공업(주)의 창업주 김삼만 회장(1912~1975)은 1973년 일본으로부터 이앙기 6대와 콤바인 25대를 수입하여 시험 보급하면서 농촌 실정에 맞는 ‘보행형 이앙기’와 수확기 제작에 나섰으며, 김 회장의 장남인 김상수 회장(1933~2017)은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앙기, 바인더, 콤바인 등을 생산 보급하면서 쌀 농업기계화시대를 열게 되었다. 한편 정부는 1978년 ‘농업기계화촉진법’을 제정하고 농업기계화를 지원했다. 정부 지원에 힘을 얻은 대동공업은 1982년에 자탈식 콤바인을 자체 제작하였고, 1984년에는 트렉터, 이앙기, 콤바인의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1985년 금성전선(현 LS엠트론)이 일본 미쓰비시 동력이앙기 일부를 국산화하여 ‘승용이앙기(4륜구동)’를 공급하면서 우리는 최단 시간에 곧바로 보행 이앙기에서 승용이양기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쌀 농업은 198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본격적인 농업기계화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기계 이앙의 일관작업체계 확립을 위해서는 벼 파종과 어린 기계 묘 육모와 관련된 부착기 개발 등에 대한 기술개발과 농지기반조성, 농기계 수리를 위한 사후관리 인프라 구축과 농가부담경감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했다. 우리 쌀 농업이 M-사이클 함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농기계 혁명을 이루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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