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농대는 과연 잘한 선택인가, 농대생으로서 걸어야 할 바른 길은 어떠한 길인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인가 등등 의문들이 꼬리를 이으면서 불투명한 미래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러한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고통 받은 백성으로 억압과 수탈을 견디며 살아온 농민을 위해 농대생으로서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대학생이 되는 가슴 설레는 입학식을 갖고 기숙사에 짐을 풀고 농대생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에 자리 잡은 농대는 조선왕조 정조 23년(1799년)에 축`조된 후 서호로 알려진 축만제(祝萬提)와 같이 조성된 서둔(西屯)이란 국영농장이 있던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가 깃든 고장이다. 서호 옆에는 농촌진흥청이 자리하고 있어 일찍부터 서둔지역은 우리나라 농업과학기술의 중심지다. 나는 고3을 마치면서 우연히 만난 농과 평생의 연을 맺고 서둔에 둥지를 틀었으며 농과 동행하는 새 인생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난 유달영 교수님(1911~2004)의 특강은 청춘의 영혼을 흔들었다. 유 교수의 대한민국의 ‘선택받은 행운아’가 된 농대생으로서 농촌부흥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라는 말씀이 젊은 가슴을 뛰게 했다. 신입생이 되어 읽은 유 교수의 '새 역사를 위하여'나 '유토피아의 원시림'에 나오는 농촌을 부흥시켜 덴마크의 새 역사를 쓴 그룬트비히와 달가스의 이야기, 이광수의 소설 '흙'에서 ‘농민이 부른다. 농촌으로 가자’라고 외치는 허숭이나, 심훈의 '상록수'의 주인공인 박동혁의 목소리가 새삼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또한 “가라, 그리고 죽으라.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들이여. 가라, 그리고 괴로워하라. 반드시 괴로움을 겪어야 할 그대들이여. 산다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산다는 것은 나의 할 바를 다하기 위해서다. 괴로워하라, 죽으라. 그러나 그대가 마땅히 되어야 할 그런 자가 되라. 한사람의 인간이 되라.” 신입생 시절 우연히 접한 프랑스 대 문호 로맹 롤랑(1866-1944)의 말은 농대생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내가 내 할 바를 다하면서 마땅히 되어야 할 인간으로서 농대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사실 나는 우리 농업, 농촌, 농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이 없었고, 농은 그저 막연한 미지의 세계였다. 농대는 과연 잘한 선택인가, 농대생으로서 걸어야 할 바른 길은 어떠한 길인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인가 등등 의문들이 꼬리를 이으면서 불투명한 미래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러한 걱정과 기대가 교차하면서 우리 역사에서 가장 고통 받은 백성으로 억압과 수탈을 견디며 살아온 농민을 위하고 농업과 농촌발전을 위해서 일하는 삶을 살기 위한 농대생으로서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무렵부터 농을 품고 농의 소리를 듣고 조금씩 농에 대해 눈을 뜨면서 농의 문제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절실한 현실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중고생시절 내내 괴롭혀온 경제 문제는 여전히 나를 압박했고 앞으로 등록금이며 생활비 문제로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당장 매달 1800원씩 지불해야하는 기숙사비를 포함한 생활비를 마련해야하는 현실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다행이 수원에 사시는 어머니의 외가 친척 분의 도움으로 국민학교 5학년 학생 3명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급한 대로 학생 한명 당 500원씩 1500원을 받는 조건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부족한 돈은 결국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누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신입생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하는 술, 담배, 당구, 바둑, 음악과 영화 감상 등등 소위 신변잡기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강의실과 도서관, 기숙사, 그리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 이외에는 어느 곳에도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다. 그것이 가장 돈이 안 드는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는 나의 지정석이 생겨났고 친구들은 나를 공부 밖에 모르는 녀석이라고 했다. 그러나 3월부터 시작된 기숙사 생활도 결국 3개월 만에 접어야 했다. 기숙사비와 생활비 절약을 위해 서울 이화여대 정문 부근에 방 두 칸을 전세로 얻어 자취하고 있는 누나와 형과 같이 생활하면서 수원까지 통학하기로 하고 6월 2일 서울 신촌으로 이사를 했다.

1964년 봄의 대학가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 데모로 들썩거렸다. 1963년 12월 17일 군정을 마감하고 박정희 정부가 새로 출범하면서 5.16군사쿠데타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대학가는 좌절된 민주주의에 대한 울분과 군사독재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저항으로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 생들의 데모이후 한일회담반대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함성은 차츰 박정희 군사독재정부를 향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열린 데모는 한일협상반대를 넘어 반독재, 반정부투쟁으로 번졌다.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단체와 정치권이 합세하면서 학생 시위는 4.19혁명 때를 방불케 했다. 6월 3일 마침내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함으로서 소위 ‘6.3사태’가 일어났다.

그 날 새벽 농대생들이 수원을 출발하여 서울대 본부가 있는 동숭동까지 상경시위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뉴스를 타고 전해졌다. 농대생들은 상경하는 도중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오후가 되어서야 삼삼오오 동숭동 집결지로 모여들었다. 나는 서울에 머물고 있었기에 상경하는 시위대 대열에는 끼지 못하고 그 날 오후에 동숭동으로 가서 그들과 합류했다. 그날 밤 박정희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국의 모든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대학은 문을 닫고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나는 짐을 꾸려 광주 본가로 내려가 여름방학 동안 대한적십자사 전남지부장인 친척의 소개로 적십자사가 운영하는 농번기 탁아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농민들의 삶의 현장인 농촌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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