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칼 포퍼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지가 존중되고 비판이 보장되며 자아실현의 길이 열려있는 ‘열린 사회(open society)’를 인간과 사회발전의 이상향으로 보았다…그는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든 특권과 독재를 거부하고 자유, 민주, 평등의 원칙을 실천하라고 했다…나는 열린 사회를 추구하는 점진적 사회개혁을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나는 미주리대학에서 내 인생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내 생각과 행동의 많은 부분이 미주리대학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우연히 찾아간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오늘의 나’를 만들고 내 젊은 날의 사상적 방황도 끝마치게 된다. 나는 미주리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순수와 열정으로 내 정신과 학문의 틀을 정립했고 미주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평생 만날 일이 없을 사람도 만났다. 우리는 술잔을 나누며 세상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그 가운데는 내 인생의 영원한 ‘첫사랑’도 있었다. 모두가 행운이었다.

미주리에서 칼 포퍼 경을 만난 것은 내 인생의 일대 행운이었다. 그의 책들을 통해 그의 생각과 교감하면서 나는 그의 철학에 빠졌고 차츰 그를 존경하게 되고 마침내 그를 내 인생의 정신적 지주로 삼게 되었다. 1974~1976년간 읽은 그의 ‘과학적 지식탐구의 논리’를 비롯한 ‘추측과 논박’ 그리고 ‘객관적 지식’이란 책을 통해 접한 그의 명쾌한 과학철학과 인식론의 논리와 논박(論駁)은 나를 놀라고 흥분하게 했다. 그는 정치철학에서도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특히 ‘역사주의의 빈곤’과 ‘개방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들이 그랬다. 포퍼는 학생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으나 마르크스주의가 ‘닫힌 사회’인 독재체제를 지향한다는 사실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다. 그는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나이 들어서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있으면 더 바보다’라고 했다. 그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지가 존중되고 비판이 보장되며 자아실현의 길이 열려있는 ‘열린 사회(open society)’를 인간과 사회발전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그는 열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도주의적 윤리와 정의’를 바탕으로 모든 특권과 독재를 거부하고 자유, 민주, 평등의 원칙을 실천하라고 했다. 책임감 있는 사회과학자가 되기 위한 인간과 사회발전을 위한 인도주의에 대한 도덕적 결단도 촉구했다. 나는 열린 사회를 추구하는 점진적 사회개혁을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나는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철학에 힘입어 슐츠-헤디 교수의 응용경제학적 농업경제학 방법론에서 진정한 자유 함을 얻게 되었다. 그들의 방법론은 자명한 진리란 인식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과학적 지식탐구의 논리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학문은 권위가 아닌 인간과 사회발전을 제약하는 ‘문제풀이’를 위한 학자들의 부단한 도전과 치열한 노력, 창조적 지식으로 세워진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농경제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문제풀이는 답이 없는 현실문제가 아닌 정해진 답을 찾는 ‘정답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김준보 교수님 말씀대로 농경제학은 농(農)의 현장의 소리를 듣고 아파하며 농이 당면한 현실 문제해결에 유용한 과학적 지식을 찾아 고민하고 도전하는 학문이란 점을 재확인했다. 1977년 11월 결혼을 앞두고 내 사랑과 같이 김 교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주례로 모시고 축복을 받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김 교수님은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나는 미주리에서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인 ‘조권희’를 만났다. 미주리에서 2년째가 되던 1974년 초 미주리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신 조순승 교수 사모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보이시며 나의 신상에 관해 물으셨다. 새 학기에 질녀(姪女) (조 교수 친형이신 조순탁 박사의 장녀)가 대학을 마치고 식품영양학과로 유학 온다고 하셨다. 1974년 7월, 그랜드 캐니언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사모님의 주선으로 그녀를 만났다. 첫눈에 들어온 설부화용(雪膚花容) 같은 그녀의 맑은 영혼과 단아한 기품이 내 가슴을 뛰게 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나는 박사학위 논문에 그녀는 식품영양학 석사 공부에 매달렸다. 우리는 공부 스트레스 속에서 틈틈이 만나 서로를 알아가며 애정의 꽃을 피워 나갔다. 서울에서는 내 공부가 늦어지는 것은 연애에 빠졌기 때문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3년의 만남이 이어졌고 나는 박사학위가 끝나 귀국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그녀는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우리는 서로의 꿈을 위해 헤어졌고 나는 귀국 길에 올랐다. 그때는 국내 유일인 김포공항 활주로가 짧아 미국에서 출발한 큰 비행기가 곧바로 서울로 들어가지 못해 도쿄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들어가야 했다. 나는 그날 밤 도쿄의 한 호텔 방에서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그녀를 향한 나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그녀에게 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이 언제가 되든 재회의 날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내 편지를 받은 그녀는 한 달 만에 귀국했고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며 결혼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은 그날 밤 그녀에게 편지를 쓴 일이었다. 결혼 후 그녀는 가정을 위해 아내와 두 아이의 엄마로서 새 삶을 선택했다. 나는 그녀의 헌신적 내조에 평생의 빚을 졌다.

유학 생활은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친구로 맺어준다. 유학생들은 모두가 공부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때문에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만큼은 마음 가는 사람끼리 만나 스트레스를 날려 보낸다. 미주리에서 5년을 사는 동안 고등학교 동창인 임승배를 만났고 박영상, 정대철 선배와 김택기, 성주영 후배를 처음 만났다. 우리 여섯은 호형호제하며 내 자취방에 모여 라면이나 김치찌개를 끓여 술을 마시며 밤새워 세상과 인생과 사랑을 말하고 때로는 자유와 민주를 논하고 유신독재를 성토했다. 모두 미주리가 만들어준 우연의 만남이었지만 우리 만남은 서울로 이어졌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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