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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7>전환시대의 경제 논리와 개방농정을 비판하다-⑦농협은 새마을운동의 ‘주연보다 더 빛난 조연’이었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농협은 전국의 시도와 시군, 읍면, 그리고 마을까지 일사분란하게 전국의 농민 동향을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조직망을 구축했다.… 농협은 농협사업과 새마을사업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사업 영역과 규모를 확장하고 정부와의 관계를 확대하며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등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설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는 6월 15일 1958년에 설립된 농협중앙회와 농업은행의 강제통합을 전격적으로 결정하고 7월 29일 새 농협법을 제정 공포했으며 불과 2개월 후인 8월 15일 새 통합농협중앙회를 발족시켰다. 새 농협중앙회는 협동조합의 원리에 따른 시군과 이동조합의 연합체가 아닌 독립법인으로 시군과 이동조합을 회원조합으로 가입시켜 지휘 통제하는 회원조합의 감독기관이 되었다. 새 법에 따라 농협운영은 중앙회장을 위원장으로 농림부와 재무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와 대의원회에서 선출되는 5인(학계 인사 2인 포함) 등 9인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맡았다. 초대 중앙회장은 내각 수반이, 초대 시군과 이동 조합장과 이·감사는 중앙회장(후에 도 지부장)이 임명하도록 했다. 정부는 1962년 ‘농협임직원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1989년 민주화로 직선제가 전면 실시될 때까지 27년간 중앙회장과 조합장을 임명했다. 정부는 농협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당근과 채찍’으로 농협을 길들였고 농협을 정부 사업을 대행하는 준정부기관으로 만들었다.

농협은 1961년 출범 이후 2만1518개에 달하는 이동조합의 영세성을 극복하고 조합경영 효율화를 위해 1964년부터 이동조합 간 합병을 시작했다. 1969년부터는 읍면 단위합병을 시작했으며 1972년까지 1567개 읍면 단위농협(‘단협’)으로 통합을 완료했다, 1970년부터 읍면 통합을 추진한 단협으로 상호금융, 생활물자사업, 비료, 농사자금, 공제, 구·판매사업 등 군 조합이 취급해온 업무이관을 추진하여 1974년까지 1545개 전 단협에서 비료와 농사자금을 취급하게 되었고, 1975년부터는 모든 단협이 상호금융(여·수신)업무를 실시했다. 1285개 단협에서 1977년 말까지 연쇄점 사업을 하면서 단협 자립경영이 가능해졌다. 읍면농협은 정부의 대 농민지원 정책자금 대출창구가 되어 농촌금융 거점이 되고 농민 경제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읍면 통합으로 조합원과 조합 간 거리가 멀어져 농민들의 조합 이용이 불편해지자 단협은 조합원과의 밀착경영을 강조하며 1970년부터 통합이 이루어진 단협의 마을(행정리·동) 단위 실천조직으로 협동회를 중심으로 작목반, 부녀회, 일조금고(一兆金庫) 등을 조직했다. 1972년부터는 농협운동과 새마을운동의 일체화를 외치며 마을조직들을 새마을운동의 마을 단위 실천조직으로 전환했다. 농협은 1974년 말까지 협동회(새마을영농회) 3만5454개, (새마을)작목반 7029개, (새마을)부녀회 7914개, 일조금고 3만2547개 등을 조직했다. 농협은 전국의 시도와 시군, 읍면, 그리고 마을까지 일사분란하게 전국의 농민 동향을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조직망을 구축했다. 농협은 1964년부터 자체적으로 추진해오던 ‘새 농민 운동’을 1972년부터 새마을운동으로 전환한다. 농협은 1972년 1월 독농가연수원(원장 김준)을 설치하고 농협 직원 33명으로 새마을 교육을 시작했다. 1973년 4월 독농가연수원을 7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1980년까지 총 362회 46,614명의 남녀 새마을지도자, 고급공무원 등을 교육했다. 농협은 1973년 중앙회에 새마을사업부, 도지부에 새마을사업과를 설치하고 직원을 청와대 새마을담당관으로 파견하는 등 새마을운동 참여와 지원을 강화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전위부대가 되어 농수산부를 넘어 내무부, 청와대 등으로 정부와 관계를 확장했다.

농협은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맞추어 농협사업과 새마을사업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농협의 사업확장 기회로 삼았다. 1972년부터 마을환경개선사업이 본격화되자 농협은 시멘트, 슬레이트, 함석, 기와 등 다양한 건축자재 등을 판매했다. 농협은 1973년 벼농사 150일 작전, 쌀 3000만석 돌파 작전 등으로 주곡자급을 위한 증산 농정이 본격화되자 비료, 농약, 종자, PE 필름, 활죽, 못줄 등 농용 자재 등의 판매에 나섰다. 농협은 정부 지원사업으로 1974∼78년간 군 조합당 1개소씩 전국에 138개의 협동새마을을 지정하고 표본 마을로 육성했다. 1977년부터는 정부 지원을 받아 30개 우수자립조합부터 시범적으로 새마을소득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여 1979년까지 200개 단협으로 확대했다. 농협은 새마을운동 지원 참여를 통해 사업 영역과 규모를 확장하고 정부와의 관계를 확대하며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등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1982년에 발행된 ‘농협 20년사’에서 “농협은 조합원 농민의 의사나 요구보다는…국가 정책적 판단(과)…정부 주도로…개발 주도형 농협으로 성장하여…농정을 지원하는 데에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합원 농민의 자발적 참여가 미흡했으며 농민권익 대변기능이 미약했다”라고 자성했다. 농협은 정부 정책사업 대행기관이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불가피했다고 했다. 농협은 스스로 새마을운동에서 ‘주연보다 더 빛난 조연’이었다고 자찬한다. 농협은 농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웠으나 농민조합원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정부와 유착된 관제, 관치농협이 되었고 조합원을 상대로 영업하는 사업기구가 되었으며 농민을 통제하는 정치기구가 되었다. 농민들은 조합원 위에 군림하는 농협에 불만을 표출하고 조합장 임명제와 조합 출자금 강제출자, 정부 대행사업과 경영수지 위주의 조합경영 등에 분노하며 농민 본위의 조합운영과 조합장직선제 등 농협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농협은 주권의식에 눈을 뜬 농민조합원들과 갈등을 빚고 그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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