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대학 졸업 날이 다가오면서 졸업 후 진로를 놓고 고심했다… 가족과 독립해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결국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을 위해 직장에 취직하는 것보다 우리 농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했다.


1967년 4학년이 되면서 나는 농사단(NSD)를 이끌게 되었고 독농가 연구회와의 인연으로 학생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NSD는 ‘카오스(혼돈)에서 코스모스(조화)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1965년 가을부터 코스모스 꽃씨 모으기 운동을 시작으로 1966년에는 서울-수원 간 국도에서 ‘전국 코스모스심기 운동’을 전개했다. 1967년에는 학생회와 함께 수원-천안 간 국도변 (58km, 양측 116km)을 18개 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역의 중·고등학교와 같이 코스모스심기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어디서나 아름답게 무리 지어 피는 민중의 꽃인 코스모스가 나라를 뒤덮어 도시와 농촌이 하나가 되는 조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 운동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코스모스심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한 참의 시간이 흐른 뒤 가까운 친구가 코스모스는 우리나라 자생화가 아닌 멕시코산 귀화식물이고, 꽃말이 ‘순정’이라고 알려주면서 그때 코스모스를 ‘민중의 꽃’이라고 한 것은 꽃에 대한 무지이며 코스모스 대신 ‘우리 꽃’ 심기 운동을 해야 했다며 나의 잘못을 일깨워주었다.

4학년 2학기 때인 9월 25일, 한국농업경제학회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개최한 전국대학생토론대회에 참가하여 ‘농업근대화를 위한 한국 농지 제도의 검토와 방향모색’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최근 주변 자료들을 정리하다 우연히 당시에 썼던 원고 초고를 발견했다. 대학 4학년 당시의 생각을 50년이 지난 지금 들여다보는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농업근대화란 농업생산력 발전을 제약하는 경제 사회적 생산 관계의 모순을 타파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 농지문제이며, 특히 농지 소유 규모의 영세성과 이용의 불합리성을 농업생산력 발전의 제약요인이라고 보았다. 그러기에 1)농지면적확장을 위한 농지조성사업을 강화하고, 2)농지의 타목적 전용을 억제하고, 3)농지세분화를 막기 위해 토지분할상속제도를 재검토하고, 4)농지이용도 제고를 위해 농지를 교환분합하고 구획을 재정리하고, 5)농지 소유 규모 3정보 상한을 완화하고, 마지막으로 6)영세소유농지의 이용도를 높이기 위해 협동경작방식 도입 등 농지정책 전반의 개선방안을 종합 정리하여 발표했다. 나는 최고상인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내 이름을 학회에 알리게 되었다.

대학 졸업 날이 다가오면서 졸업 후 진로를 놓고 고심했다. 대학 다니는 동안 나는 ‘자신의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누구를 위해 대신 사는 것도 아닌, 자신을 위해 자신이 책임지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발전과 만족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는,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가족과 독립해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결국은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을 위해 직장에 취직하는 것보다 우리 농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했다. 당시 나는 한 친구로부터 졸업 후 농촌 투신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받고 구체적인 참여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쌀농사를 비교적 크게 짓고 있는 경북 상주의 한 농장 주인과 뜻이 맞아 쌀 생산에서 가공, 판매까지를 통합 경영하는 새로운 쌀 농업발전모델 겸 사업모델을 같이 만들어 보자는 친구의 제안은 당시로는 시대를 앞서가는 도전적 과제였다.

농업경제학회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10월 어느 날이었다. 뜻밖에 농촌진흥청 농업경영연구소 김동희 소장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김 소장은 소장실로 찾아간 나를 반기시며 졸업 후 나의 진로가 무엇인지를 물으셨다. 농촌 투신을 검토하고 있다는 나의 대답에 김 소장은 “젊은 농학도로서 농촌 투신을 생각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농을 위하는 길은 농촌 투신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길도 있다”라고 하셨다. 그동안 나를 지켜보았다며 나는 ‘운동가의 길보다는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것이 장차 우리 농업·농촌·농민과 농정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것 같다’라고 하시며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셨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대학원에도 다닐 수 있게 해 주겠다’라는 뜻밖의 제안도 하셨다.

솔직히 김 소장으로부터 대학원 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까지 나는 한 번도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김 소장의 뜻밖의 권유는 나를 흔들었고 처음으로 학문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 나는 결국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고 친구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김 소장은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나를 학문연구의 길로 이끌어 인생의 새 장을 열도록 조언해 주신 나의 영원한 멘토가 되셨다.

그렇게 대학 4년을 마무리 지어가던 11월 24일, 나는 제5회 상록문화상 시상식에서 학술상인 ‘아서(ACER) 상’을 받았다. 농대신문사인 상록학보사가 주최한 것으로 매년 각과 학생대표들로 구성된 예비심사 회의에서 졸업예정자 가운데 학술, 문예, 단체활동부문 별로 후보자를 선정하고 교수회의에서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여 서울대학교 총장상을 수여했다. 상록학보사는 수상자 프로필 난에 나에 대해 ‘정의와 학문에의 끊임없는 정열을 상징하는 단풍나무(ACER)가 그를 찬(讚) 한다’라고 썼다. ‘대학 4년간을 농을 위한답시고 무던히도 뛰어다녔고, 남긴 일 또한 푸짐하다’라며 나를 ‘현대판 허숭’이라고도 했다.

대학 4년을 영광 가운데 끝마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나와 뜻과 열정을 같이했던 친구와 선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뒤늦게나마 그때 못다 했던 감사의 인사를 그들 모두에게 전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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