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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2>춥고 배고팠던 한겨울의 한반도/⑤전쟁과 폐허의 땅에서 일어나다
   
 

우농(愚農) 최양부

1955 년 이후 26년간 지속된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전후 국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고 부족한 국가재정을 메우는 등 나라경제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지만, 농가경제를 압박하고, 면화와 밀, 옥수수 등의 국내생산기반 붕괴라는 부작용을 남기기도 했다.


1952년, 6.25전쟁의 와중에 나는 국민학생이 되었고, 전후 폐허 속에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가 열려 공부하게된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교육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외치며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교육에 앞장서 건국당시 80%에 달한 문맹퇴치를 위해 1949년 ‘국민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전쟁 중에도 전시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덕분에 나를 포함하여 1945년에 태어나 ‘해방둥이’가 된 약 37만 2000명으로 추산되는 대한민국의 새싹들은 전쟁과 폐허의 땅에 몰려온 온 갓 풍상을 이기고 일어났다.  

나는 국민학교 1·2·4·5학년 통신표와, 1학년부터 6학년까지(1952~1957) 받은 우등상장, 그리고 2·3·4·6학년의 개근상장을 간직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일기쓰기, 글짓기 등으로 받은 상장들도 몇 장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그것들이 있어 60여 년 전 나의 국민학생 시절을 마치 어제 일처럼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신표에는 담임 선생님들이 직접 쓴 나에 대한 한두 줄 관찰 소감과 평가가 기록되어있다. 2학년 통신표에는 “전 교과 우수함, 조리 있게 발표를 잘함, 예의바르고 명랑함” 이라고 쓰여 있다. 4학년 것에는 “부반장으로 학습태도는 우수하고, 침착하고 온순하여 모범이나 인내성, 결단성, 적극성, 지도력이 부족하고 여성적인 면이 있다”고 적혀있다. 5학년 담임선생님은 “사물에 대한 관찰연구가 양호하고 독서력이 있어 각과 성적이 우수하며, 명랑 쾌활하고, 표현력이 투철하며, 자주정신이 농후한 전도유망한 어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글짓기를 잘해 옥중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도 곧잘 썼다. 나는 막내아들인 탓도 있었겠지만 공부 잘하고 심부름 잘하는 어머니의 사랑받는 아이였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전후(戰後)의 대한민국은 정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 전체인구의 70%가 넘는, 농경국가였다. 그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농민들은 나라를 위해 전쟁과 전후 복구비용 조달 등을 위한 조세부담의 무거운 짐을 져야만 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1년 ‘임시토지수득세’를 신설하고 수득세로 징수한 양곡(현물)으로 군량미를 확보하고 수집된 양곡을 팔아 재정에 보탰다. 전체 조세수입의 30%를 넘나드는 것으로 196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외에도 강제수매, 양비교환, 미곡담보융자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에게 부담을 지웠다. 농민들은 춘궁기 보릿고개를 고리채와 장리쌀로 견디고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만 했다.  

1953년 휴전이후 나라는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해방당시 남한인구는 160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해방이후 일본, 만주, 중국으로부터 귀환동포를 비롯하여 북의 농지개혁이후 지주, 재산가, 친일부역자 등에 대한 숙청작업이 본격화 되면서 1948년까지 남하한 100만이 넘는 동포와 전쟁 중 피난 온 동포 등으로 인해 1960년 인구는 2500만 명 수준으로 급증하면서 식량부족사태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과 1955년 ‘잉여농산물도입 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의 공법(Public Law) 480호에 의한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을 본격화했다. 잉여농산물 판매대금으로 적립한 대충자금의 80∼90%는 우리 정부가 사용하였으며, 이는 정부세입예산의 40∼50%를 차지했고 대부분 국방비와 전후복구비 등에 사용 되었다. 미 잉여농산물 무상원조는 1963년부터 무상과 일부 유상(장기저리차관)으로, 1972년부터는 현금구매로 바뀌었다가 26년만인 1981년에 종결되었다. 1945년 미군정시대에 시작된 한국과 미국농업의 만남은 1950-60년대 원조와 차관시대, 1970-80년대 제한수입시대, 1990년대 GATT와 UR, WTO의 자유개방시대, 2004년 이후부터는 FTA시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1955년 이후 26년간 지속된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는 총 17억 2,800만 달러(무상 8억1200만, 유상 9억1600만 달러)로 전후 국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고 부족한 국가재정을 메우는 등 나라경제 유지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면화와 밀, 쌀, 보리, 옥수수 등 저가로 도입된 잉여농산물은 농산물가격 하락을 가져와 국내 물가안정에는 기여했지만 농가경제를 압박하고, 면화와 밀, 옥수수 등의 국내생산기반 붕괴라는 부작용을 남기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는 절박한 식량문제해결을 위해 미맥증산을 위한 ‘농업증산3개년계획’ (1949~1951)을 수립하고 추진했으나 6.25동란으로 중단되었다. 전후에는 유엔국제식량농업기구(FAO)의 도움을 받아 세운 ‘농업증산 5개년계획’(1차 1953~1957, 2차 1958~1962)에 따라 종자개량, 농사법 개선, 비료사용량 증대와 개간사업 등을 추진했다. 특히 화학비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1955년에는 충주비료공장을, 1958년에는 나주비료공장을 착공하고 각각 1961년과 62년에 준공하면서 1960년대 본격적인 화학비료의존 농업시대를 열고 식량생산을 증가시켰다.   

또한 이승만 정부는 1956년 5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농과대학 H. 메이시 학장 등이 한국 농업교육과 연구지도 실태를 시찰하고 제출한 ‘메이시 보고서’의 건의에 따라 한·미간 농촌지도사업발전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1957년 2월 12일 농업기술개발을 위한 연구시험과 농민들에게 농사기술과 생활개선을 지도하기 위한 목적의 ‘농사교도법’을 제정 공포하고, 5월 28일 수원에 ‘농사원’을 설립했다.

1950년대를 전후한 나라경제는 한마디로 미국에 의존하는 ‘원조경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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