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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5>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길을 찾아 나서다-③북한, 협동농장체제 구축으로 사회주의 농업·농촌을 건설하다
   
 

우농(愚農) 최양부

북한은 16년(1946~1962)간에 걸쳐 농지개혁으로 농가에 분배했던 농지를 회수하여 협동농장에 편입시키면서 모든 농지를 공유화한 다음 국유화하였다. 북한 농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가옥과 작은 텃밭을 제외한 농지와 농기구, 가축, 가내수공업 등 생산수단 일체를 협동농장에 편입시키고 농지 없는 농업노동자가 되었다.


북한이 1968년 1.21사태와 같은 대남무력도발을 감행한 것은 6.25 전쟁 이후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성과를 바탕으로 1964년부터 시작한 ‘남조선혁명론’에 의한 대남전략에 따른 조치였다.

북한은 전쟁으로 초토화된 경제재건을 위해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 3개년계획 (1954~1956)’을 수립하고 특히 소련, 중국과 동독, 체코 등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받아 중화학공업 재건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 등과 이념적 갈등으로 원조가 감소하자 ‘제1차 5개년계획(1957~1961)’을 시작하는 1957년부터 ‘천리마 운동’을 거국적으로 추진하여 5개년 계획을 1년 앞당겨 달성하는 등의 큰 성과를 냈다.

천리마 운동은 북한식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자력갱생 운동이며 사상개조 운동이었다. 1972년에는 헌법에 ‘천리마 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 노선이다’라고 규정했다. 북한은 천리마 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1961년부터는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고 ‘주체사상’을 앞세워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김일성 우상화를 시작했으며, 1968년에는 대남, 대미 군사도발을 일으켜 한반도를 군사적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박정희와 김일성은 비밀리에 접촉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대치국면을 해소하고 이를 각각 자신들의 국내 정치권력 기반 강화수단으로 활용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헌법을 만들어 제왕적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독재체제를 강화했으며, 김일성은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고 주체사상에 입각한 김일성 수령체제를 확립했다.

북한은 1953년 7월 휴전 직후부터 사회주의 농업·농촌건설을 위한 농촌개조에 나섰다. 1946년 3월 농지개혁을 단행한 북한은 먼저 마을 단위로 농업협동조합 조직을 시작하여 1958년까지 1만3309개를 설립했다. 북한의 농업협동조합은 한국과 다른 농업생산을 협동으로 하는 생산협동조합이다. 2단계로 북한은 읍면과 전통적인 독립 자영농인 가족 농가를 기반으로 형성된 마을을 해체하고 그 대신 500ha (150만 평) 규모의 농경지를 가진 300호 농가를 기본으로 하는 대규모 리(里)를 새로운 행정단위로 만든 다음 마을 단위 협동조합을 리 단위로 통합하여 3843개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북한은 마지막으로 1962년까지 리 협동조합을 협동농장체제로 전환하고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실천하는 공산주의적 집단촌을 건설하면서 사회주의 농업·농촌개조사업을 완료했다.

북한은 16년(1946~1962)간에 걸쳐 농지개혁으로 농가에 분배했던 농지를 회수하여 협동농장에 편입시키면서 모든 농지를 공유화한 다음 국유화하였다. 북한 농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가옥과 작은 텃밭을 제외한 농지와 농기구, 가축, 가내수공업 등 생산수단 일체를 협동농장에 편입시키고 농지 없는 농업노동자가 되었다.

이후 북한은 1964년에 발표한 김일성의 ‘사회주의 농촌 문제 테제’에 따라 농업·농촌의 주체화를 위해 농업의 공업화, 농촌의 문화화, 농민의 노동 계급화, 농지 소유의 전 인민화(국유화)를 선언하고, 농업의 수리화, 전기화, 기계화, 화학화 등을 추진했다. 북한농업은 1960~1970년대에 이미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뜨락또르(트랙터의 북한식 발음)’를 이용한 대규모 기계화 영농체제를 확립하고 식량 생산이 증가하자 한국의 가족농 중심의 소농경영보다 대농경영이 더 우수하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북한경제의 빠른 성장으로 국민소득이 증가하자 심지어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보다 우수하다는 성급한 평가들이 나오기도 했다.

1968년 한반도가 군사적 긴장에 빠져있을 때 세계에는 소위 ‘68혁명’이라고 부르는 젊은 세대들의 체제 저항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기존 체제와 권력과 질서와 가치에 대한 저항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고 미국, 일본으로까지 확산했다. 학생들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건설’을 외치며 체코에서 일어난 자유화, 민주화 운동을 탱크로 짓밟아버린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며 반전과 평화를 외쳤다. 학생들의 시위는 사회의 기존 질서와 가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넘어 성 평등, 여성해방, 성 소수자 인권 보호, 동성애와 낙태, 마약 허용 등을 주장하며 종교에 저항하고 히피 문화를 만들었다. 젊은 세대들은 환경파괴를 비판하고 환경보호를 외치며 환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70년대 활성화된 우리 노동운동을 비롯한 반독재 등 기존 체제와 질서에 저항하는 학생운동도 결코 68혁명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젊은이들의 환경운동에 불을 지핀 것은 1962년에 출간된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 쓴 ‘침묵이 봄(Silent Spring)’이라는 책의 영향이 컸다. 카슨 여사는 1950년대 미국의 DDT 등 화학합성 살충제를 비롯한 살균제, 제초제, 고엽제, 등등 독성물질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간의 건강과 밥상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자연환경파괴의 실상을 고발했다. 카슨의 책은 20세기 세계인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1960~1970년대 미국과 유럽의 주류 농업인 화학 농업에 대한 새로운 대안 농업으로 ‘지속가능 농업’을 생각하게 하고 ‘환경(보전)농업, 저투입 정밀농업, 유기농업, 자연농업’ 등을 불러왔으며, 1972년에는 세계유기농업운동연맹 (International Federation of Organic Agriculture Movements, IFOAM)의 창설도 가져왔다. 그러나 당시 우리 농업은 주곡자급달성을 위한 식량 증산 운동에 매달려 있었고 증산을 위해 필요한 비료와 농약이 크게 부족했고 비쌌던 터라 카슨의 경고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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