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KDI와 통합론을 잠재우기 위해 신설되는 연구원의 연구활동과 대상을 농업경제를 넘어 산림, 수산경제와 농산어촌 사회개발 분야로까지 확대하고, 농촌경제사회개발을 강조했다.


1977년 12월 29일, 경제기획원의 ‘농정전환론’ 제기로 부처 간 갈등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취임한 장덕진 농수산부 장관은 취임 10일 만에 기자회견을 하고 고도성장으로 인한 경제사회 구조전환에 대응하기 위한 전환기 농정과제에 대한 조사연구 강화를 위해 농수산부 국립농업경제연구소(‘연구소’)를 재단법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연구원’)으로 개편한다고 발표했다. 장 장관은 1975년 농수산부 차관 재직 당시 김동희 연구소 소장과 함께 연구소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같은 수준의 농정연구 싱크탱크로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했다가 막바지 단계에서 무산되었던 것을 아쉬워했다. 장 장관은 발령받은 직후 농수산부 관계자들을 조용히 불러 취임 후 추진할 주요 농정과제들을 정리한 후 다음 날 박정희 대통령을 독대하고 KDI 수준의 ‘농촌경제사회발전연구기관’을 설립하겠다는 구상을 보고하고 내락을 받았다고 한다.

장 장관과 김동희 기획관리실장은 2년 전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전준비를 철저히 했다. KDI와 통합론을 잠재우기 위해 신설되는 연구원의 연구 활동과 대상을 농업경제를 넘어 산림, 수산경제와 농산어촌 사회개발 분야로까지 확대하고, 특히 4차 계획이 사회개발을 중시하고 있는 점을 반영하여 농촌경제사회개발을 강조했다. 연구소 재단화의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장 장관이 앞장서면서 연구소 개편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5년부터 연구소 재단화를 주창(主唱)해온 장본인인 김동희 기획관리실장이 장 장관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재단설립작업을 진두지휘하게 된 것은 한마디로 천운(天運) 이었다. 농수산부 간부 중에는 김 실장의 ‘구두닦이론’을 언급하며 연구소가 정부 정책만 뒷바라지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고 우려를 표시하며 김 실장을 견제하는 이도 있었지만 질주하는 열차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1978년 2월 24일 대통령을 설립자로 하는 ‘재단법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설립(안)’에 대한 대통령 재가와 설립자금(100만 원) 출연이 이루어졌다. 3월 3일 연구원 설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3월 10일에는 농수산부장관 법인설립허가를 받아 3월 16일 설립등기를 했다. 3월 26일 제1차 이사회를 열고 김보현 전 농림부 장관을 초대원장에, 김동희 실장을 부원장에 선임했다. 예상 밖의 원장인사로 연구소가 술렁거렸다. 김 실장이 장 장관의 언질까지 받아 초대원장에 내정된 상태에서 초대원장은 장관급으로 해야 한다며 김보현 전 장관을 미는 농수산부 간부와 내무부의 강한 로비 때문이었다. 김보현 원장은 원장으로서 전문성이 없다는 비판론이 일자 김 부원장에게 ‘원장은 연구원을 대표하는 상징적 자리로 하고 차기 원장이 될 부원장이 책임지고 연구원을 운영해 달라’며 도움을 청하면서 원장문제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1978년 4월 1일 마침내 연구원이 발족하고 1967년 9월 창립한 농업경영연구소는 10년여의 역사를 마감했다. 1978년 12월 5일 연구원 육성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연구원 설립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연구소 직원들은 농수산부 소속으로 남거나 연구원행을 선택했다. 당시 김성호 소장은 농수산부에 남았다가 주아르헨티나 농무관직을 끝으로 퇴직하고 연구원으로 돌아와 역사학자로서 ‘한국농지개혁사’ 등 중요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김동희 부원장은 1967년 9월 8일 농업경영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1978년 4월 1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설립으로 폐지되기까지 10년여 동안 현장 중시의 실증연구를 강조하며 연구원들이 농업·농촌현장을 발로 뛰면서 농가소득향상과 농업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책대안을 만드는 실사구시의 연구를 하도록 했다. 실사구시 정신은 연구소의 전통이 되었고 새로 개편된 연구원으로 계승되었다. 김 부원장은 무엇보다도 우수연구인력 확보와 훈련에 힘썼고 그렇게 훈련된 연구인력들은 초창기 연구원을 이끄는 주역들이 되었다. 김 부원장은 인사와 예산 등 연구원 운영에 모든 책임을 지고 연구원의 조기정착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연구원이 장기적으로 독자적 발언권을 갖기 위해서는 재정 독립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며 ‘연구원발전기금’조성을 위해 연구원예산을 긴축운영하면서 직원들의 불만도 사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김 부원장이 행정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으나 이는 연구가 정부와 권력의 구두나 닦아주는 구두닦이가 아니라며 정책의 공공성과 합리성을 따지는 학자적 소신과 양심을 지키려는 행동 때문이었다. 1967년 농업경영연구소를 창설하여 키우고, 10년 만인 1978년 국내외로부터 실력과 권위를 인정받는 국가적 농정연구기관이 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을 설립한 것은 김 부원장의 비전과 집념과 열정과 헌신 때문이었다. 1981년 김보현 원장이 취임 당시의 약속을 어기고 재임하면서 1982년 2월 부원장직을 사임하고 대학으로 옮긴 것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掘井之人), 우물에서 물을 마실 때는 그 우물을 판 사람의 수고를 기억하라’라는 말이 있다. 연구소 설립 51년, 연구원 발족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구원이 김 부원장을 연구원 발전의 초석을 놓고 학문적 권위를 가진 연구기관으로 키우고 인재양성에 노력한 헌신을 기억하지 않고 그동안 수없이 거쳐 간 부원장 중의 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연구원에 몸담았던 나를 비롯한 연구원 사람들 모두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이제부터라도 1967년을 연구원 창립연도로 새로 기산(起算)하고, 송암 김동희(松巖 金東熙, 1928~2010) 박사님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설립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기억하고 기리는 역사바로세우기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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