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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5>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길을 찾아 나서다-⑥농업경영연구소, 국책연구기관으로 거듭나다
   

우농(愚農) 최양부

김동희 소장은 연구가 정부 정책을 뒷바라지만 하는 소위 ‘구두닦이’ 역할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연구의 정책평가와 비판기능을 강조하고, 농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개발 연구와 농의 문제 파악을 위한 현장 중시의 실사구시적 실증연구를 강화했다.


1968년 10월 김동희 초대소장 후임으로 취임한 윤근환 2대 소장은 농학을 전공한 농업행정가로 학자적 진솔함을 가진 김동희 소장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는 연구소의 정책지원기능을 강조하며 취임 초부터 뛰어난 정무 감각으로 정부 동향을 살피고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을 지원하는 연구 과제를 선정하여 연구 결과를 농림부 국·과는 물론 경제기획원, 청와대 등 관계기관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열심히 브리핑했다. 정부의 역점사업인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지원을 위해 농산물 품목별 표준 수익성 지표를 개발하여 농가경영지표로 삼도록 정부에 건의했다. 연구자들은 밤새워 보고용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윤 소장을 수행했다. 윤 소장은 ‘내실보다 홍보’에 치중한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그런 그의 노력 덕분에 연구소는 농촌진흥청에서 농림부 소관으로 이관되어 농림부 산하 연구소로 위상이 격상되었다.

1970년 1월 박정희 대통령 농림부 순시 때 조시형 장관이 연구소 농림부 이관을 건의했고 4월 8일 이관이 이루어져 사무실을 서울로 옮겼다. 정부는 농협중앙회조사부에 의존해오던 정책지원기능을 연구소로 옮겼다. 윤 소장은 1970년 12월 말 경제수석실 농림비서관으로 발탁되어 청와대로 떠났고 이후 김보현 농림부 장관 시절 농림부로 옮겨 농산, 식산 차관보, 농업기술연구소장, 농촌진흥청장, 농협중앙회장 등 요직을 두루 섭렵하면서 뛰어난 친화력으로 인맥을 쌓았고 마침내 1988년 노태우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71년 초, 김동희 초대소장이 농업경제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3대 소장으로 복귀하면서 연구소는 본연의 연구 분위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김 소장은 연구가 정부 정책을 뒷바라지만 하는 소위 ‘구두닦이’ 역할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연구의 정책평가와 비판기능을 강조하고, 농의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개발연구와 농의 문제 파악을 위한 현장 중시의 실사구시적 실증연구를 강화했다. 그는 연구영역을 기존의 농업경영중심에서 농업경제사회 분야로 넓히고 국제협력연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연구수준의 질적 향상을 위해 연구원들의 연구능력향상에도 관심을 쏟았다. 연구소는 차츰 학계와 농업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연구소는 1971년 9월부터 주한미국원조사절단(USOM)과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과 공동으로 한국농정연구사상 처음으로 계량모형을 이용한 한국농업개발 장기 전략에 관한 한국농업부문연구 (Korea Agricultural Sector Study, KASS) 사업을 추진했다. 1972년 4월부터는 시뮬레이션모형개발연구를 새로 착수하면서 많은 연구 인력을 새로 충원했고 연구원들의 미국 연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김 소장은 ‘주한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설득 인재양성을 위한 원조 지원을 받아 연구소 직원들의 미국 연수 기회를 만들었고 김영식, 주용재, 허신행, 강정일 등이 미국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했다.

김 소장은 ’연구소의 많은 인력을 해외에 파견하여 1년 또는 석사 및 박사과정 훈련을 받게 했다. 한때는 연구직 총수의 3분의 1까지 파견시킴으로써 연구소가 아니라 연수원이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 소장은 후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초창기 연구를 이끈 인재들을 키워냈다. 김 소장은 오로지 연구소를 학문적으로나 정책적으로 권위 있는 연구기관으로 만드는데 헌신했고,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 높은 국책연구기관으로 거듭나게 했다. 1972년 연구소를 홍릉으로 옮기고 1973년 11월 30일 명칭도 높아진 위상에 맞게 ‘국립농업경제연구소’로 변경했다.

1968년 8월 농사단(NSD) 수련대회 사건 이후 나는 연구소의 각종 연구사업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연구와 현장 경험을 쌓아나갔다. 1969년에는 이질현 연구관이 추진하는 ‘한국 미곡생산에 영향을 미친 제 요인분석’이란 연구를 도왔고 이를 학술논문으로 작성하여 난생처음으로 공저자가 되어 농업경제학회지에 이름을 올렸다. 김성호 연구관의 농업지대(農業地帶) 구분과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발이 주변 농촌에 미치는 영향조사에 참여했으며,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으로 추진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락교 (일본 절임용 채소) 대일 수출중단과 가격폭락, 앙고라토끼 과잉 번식 등 실태조사연구에 참여했다. 1971년에는 김동희 소장과 공저로 ‘지역경제의 불균형성장과 농업 발전의 지역성’이란 논문을 작성 농업경제학회지에 발표했다.

1969년 말 대학원 2년 차를 마치면서 나는 졸업논문작성에 착수했다. 김문식(金文植, 1920~2011) 지도교수님에게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공업화로 인한 산업화의 충격이 농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변화’에 대한 나의 오랜 관심에 대해 말씀드렸다. 김 교수의 지도를 받아 졸업논문 제목을 ‘도시화-공업화에 따른 농가소득의 지역 격차에 관한 연구: 서울경제권을 중심으로’로 정하고 서울근교 농촌과 오지농촌을 비교하여 농가들의 시장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농업생산의 상업화와 농외취업증가로 인한 겸업화 등 농가 경제의 변화실태와 그로 인한 농가소득의 지역 간 격차에 관한 실증연구를 추진했다. 1969년 말 연구소에 제출한 연구계획서가 1970년도 신규과제로 채택되어 연구비 지원을 받아 1970년 6∼7월 2개월 동안 서울근교(100호)와 오지농촌(220호)에서 농가실태조사를 했다. 농가 조사는 대학에서 만나 나의 권유로 농경제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서종혁 후배가 도왔다. 그 일로 그는 임시연구원으로 연구소근무를 시작했다. 1971년 조사 결과를 정리하여 연구보고서를 연구소에 제출하고, 이를 석사학위 논문으로 재작성하여 대학원에 제출 1972년 2월 입학 4년 만에 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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