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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10>우루과이라운드(UR) 농업무역협상의 최전선에 서다-(11)1993년 12월 18일 아침 김영삼 대통령을 처음 만나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 최양부

1993년 12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쌀 시장개방에 대한 이해와 협조를 요청했다. 김 대통령은 UR 협상의 성공적 타결을 위해 자신의 대선 공약을 깨고 쌀 시장을 개방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쌀 의무수입량을 처음 5년간은 0%로 해줄 것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UR 협상 정부대표단은 당초 설정한 3∼5%의 협상 목표를 폐기하고 청와대 경제수석으로부터 지시받은 새로운 쌀 시장개방 협상 목표와 전략에 따라 미국 측에 우리의 요구사항을 전달해 놓고 있었다. 하루는 정부 협상대표단과 조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선준영 외무부 차관보는 “이번 쌀 협상에서 청와대로부터 미국 측과 협상에서 맞서 버티라는 지시를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문민정부는 전임 정부들과 정말 다르다”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미국과 많은 협상에 참여했는데 “과거에는 미국과 갈등이 생기면 맞서지 말고 미국 측 의견을 수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번은 반대다”라고 했다.

12월 8일 GATT 사무국은 한국과 일본의 쌀 시장개방 시기를 유예하는 내용을 담은 UR 농업 협정문 부속서(Annex) 초안을 발표했다. 사무국은 부속서를 A. B 조항으로 나누어 미-일간 협상 결과를 반영하여 구체적인 숫자를 표기한 일본에 적용되는 선진국 조항(Section A)과 협상이 진행 중인 한국 등에 적용될 개도국 조항(Section B)으로 구분했다. 개도국 조항에 들어갈 구체적인 숫자들은 공란이었다. 부속서 초안을 받아본 순간 나는 ‘소름 돋는 희열’을 맛보았다. 1990년 이후 지난 4년간 이 순간만을 위해 혼신을 다해왔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우리가 바라는 숫자를 채워 넣는 일만 남았다. 서더랜드 총장은 12월 13일 오전 10시까지 한-미 간에 합의된 최종 숫자를 제시해 달라고 요구했다.

12월 9일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UR 협상의 성공적 타결을 위해 UR 농업협상의 기본 원칙인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 원칙’을 수용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쌀 시장개방만은 막겠다’고 한 자신의 농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며 농민에게 사과했다. 김 대통령의 특별담화는 TV를 통해 제네바 현지에도 전해졌다. TV를 지켜본 사람들은 ‘한국 대통령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며 환영했다.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미 간에는 쌀을 제외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유제품, 신선 감귤, 오렌지 쥬스 등 비교역적 관심품목(NTC)을 포함한 한-미 양국의 주요 관심품목에 대한 막바지 실무협상이 진행되었다. 12월 13일 4차 한-미 농림부 장관회의에서 쌀 등 협상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농업에 대해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아 쌀 시장개방을 10년간 유예받았다. 한미 양국은 최소의무수입물량은 처음 5년간(1995-99)은 1%에서 시작 매년 0.25%씩 늘려 2%로, 다음 5년간(2000-2004)은 2%에서 매년 0.5%씩 늘려 4%로 하는 방안에 최종합의했다. 미국은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로 요청한 0%는 사실상 쌀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방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최소한 1%로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김 대통령의 전화는 양국이 쌀시장 개방 첫해의 최소의무수입물량을 1%로 최종 합의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의 쌀 협상은 김 대통령이 농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하는 등 협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만들어 낸, UR 농업협상의 최대 성과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12월 14일 GATT 사무국은 한-미 간에 합의된 숫자를 담은 UR 농업 협정문 부속서 최종안을 수석대표회의 상정하여 회원국들의 승인을 받았다. 우리는 일본(6년 유예, 4∼8%)보다 월등히 좋은 조건(10년 유예, 1∼4%)으로 쌀시장을 개방하게 되었다. 서덜랜드 사무총장은 “한국 협상 대표들이 한국의 처지를 아주 강력하게 잘 대변했다고 본다”고 쌀 협상을 높게 평가했다. 외국의 협상 대표들도 한국이 매우 파격적인 숫자를 만들어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한-미 간 합의한 숫자가 공개되자 충격을 받은 일본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하시모토 외무상이 GATT로 달려와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GATT 사무국은 일본도 미국과 합의해 오면 숫자를 고쳐주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다. 1993년 12월 15일 1986년 9월에 시작되어 8년여를 끌어온 UR 협상이 마침내 타결되었다.

1993년 12월 18일 아침, 김영삼 대통령은 정부 UR 협상대표단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조찬을 같이 하면서 정부대표단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처음 뵙고 인사드렸다. 김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내 인생의 진로를 바꾸는 ‘운명의 만남’이었다. 그날 나는 청와대(대통령비서실)에 신설예정인 ‘대통령 농수산수석비서관’ 후보자로 선정되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면접시험을 본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날 오후 나는 박재윤 경제수석으로부터 내가 ‘대통령 농수산수석비서관’(후일 ‘농림해양수석비서관’으로 명칭변경)으로 최종 낙점(落點)된 사실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1993년 12월 23일 오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 받고 1998년 2월 24일까지 4년 2개월여간 UR 이후 ‘변화와 개혁의 신농정’의 중심에 서서 우리나라 농림·수산과 해양정책을 통할(統轄)하게 된다. 마침내 나는 우리 농어민과 농수산 발전을 위한 농정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대학 시절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때 나는 지천명(知天命)을 깨닫기 시작하는 불혹(不惑)의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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