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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4>농을 품고 사랑하고 아파하다/③농(農)에 대한 사명감을 깨닫기 시작하다
   

우농(愚農) 최양부

외화절약을 위해서라도 식량증산이 절실했고 최소한 주곡(쌀, 보리)의 자급달성을 이루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 해 3월 13일에 가진 식량증산 연찬대회에서 ‘경제적 자립은 식량의 자급자족으로부터 이루어져야한다’며 식량자급을 위한 ‘범국민적 증산운동을 전개 하겠다’고 선언하고 정부주도의 강력한 ‘증산농정’을 시작했다. 


1963∼1964년간은 나에게도 나라에도 새로운 전환과 도전의 시기였다. 그 때 중고시절을 마감하고 농대생이 되기 위한 새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라는 2년 반의 군사독재정치를 마감하고 새 헌법을 만들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을 위해 부심(腐心)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4월 혁명으로 개정한 헌법에 따라 민주당 정부가 도입한 내각책임제를 폐지하는 한편 국회도 양원제를 단원제로 환원시키고, 임기 4년, 1차 중임의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했다. 이는 이승만 정부 때의 부통령제를 없애고 제헌 헌법 당시의 국무총리제를 부활시킨 절충형 대통령제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새 헌법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게 14만표라는 근소한 차로 당선되어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군정을 마감하고 새 정부를 출범시켰지만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한 권위적 대통령제를 확립하면서 독재정치의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196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당면한 식량부족사태를 항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한 식량증산 장기계획을 수립하도록 농림부에 지시했다. 그동안 PL480에 의거 무상원조로 들여오던 미 잉여농산물이 1963년부터 장기차관으로 (1971년부터는 다시 현금구매로) 바뀌면서 외환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경제에 식량수입은 큰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외화절약을 위해서라도 식량증산이 절실했고 최소한 주곡(쌀, 보리)의 자급달성을 이루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 해 3월 13일에 가진 식량증산 연찬대회에서 ‘경제적 자립은 식량의 자급자족으로부터 이루어져야한다’며 식량자급을 위한 ‘범국민적 증산운동을 전개 하겠다’고 선언하고 정부주도의 강력한 ‘증산농정’을 시작했다. 

1964년 8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농림부는 미곡, 맥류, 두류, 서류, 잡곡류 등 식량의 자급달성을 목표로 하는 ‘식량증산 7개년계획(1965-1971)’(‘7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농림부는 기존에 추진하고 있는 농경지확장과 유휴농경지 적극 활용, 수리시설 개선 확충, 토지개량, 비료, 농약사용증대, 종자개량 등 연구개발과 지도보급강화 등과 함께 작물별 증산왕, 퇴비증산왕 선발 포상 등 적극적인 증산농정을 추진했으나 식량자급의 꿈은 여전히 힘겨운 희망이었고 우리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1977년까지 14년간 더 많은 피와 땀방울을 흘려야 했다.

1962년에 시작된 1차 계획의 성공적 추진은 식량증산과 함께 국가의 명운이 걸린 또 하나의 국가적 당면과제였고 이를 위해 필요한 투자재원 조달이 절실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우리는 전적으로 미국 원조에 의지해 무역적자를 메꾸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분단의 아픔과 공산주의와 싸우는 동병상련의 서독이 도움을 요청하는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서독은 한국에 3500만 달러 차관을 약속하고 그에 대한 지급보증으로 한국인 광부의 독일파견을 요청했다. 서독은 높은 경제성장으로 광산노동자 부족에 시달리는 한편 우리나라는 실업자가 넘쳐나고 있던 때였다. 1963년 12월 정부는 서독과 공식으로 광부파견 협정을 체결하고 247명의 광산 노동자를 선발하여 보낸 것을 시작으로 1977년 이 사업을 종료할 때까지 14년간 총 8395명의 광부를 서독에 파견했다.

또한 정부는 1950년대 말부터 비공식으로 서독에 파견하던 간호사를 1966년부터 26명을 직접 선발하여 파견함으로서 이를 공식화하고 1971년 7월에는 서독과 간호사파견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77년 파독을 마감할 때까지 총 1만371명을 파견했다. 1960~70년대 외화부족에 시달리던 시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국내 가족들에게 송금한 외화는 연간 5000만 달러 수준으로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2.6%로 추산되는 큰 규모였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에 젖은 돈은 가족들의 생계와 학비로 쓰였고 국가적으로는 1·2차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재원이 되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1964년 9월 정부는 월남전 의무병 파견을 시작으로 1965년 3월부터는 전투병을 파견하여 1973년 ‘월남 패망’으로 철수할 때까지 8년간 총 31만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 가운데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232명, 고엽제 피해자 15만9000여명이 발생했다. 월남전 파병으로 군인과 노무자들이 흘린 피와 땀의 대가로 1965∼1973년간 벌어들인 총 2억3556만 달러 규모의 외화수입과 기업들의 월남전 특수는 1·2차 계획 성공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64년 6.3사태 등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국민적 저항에도 정부는 한일협약체결을 서둘렀고 1965년 6월 21일 대학휴교조치를 내리고 22일 일본과 협정에 조인했다. 식민시대를 청산하고 양국 간 새로운 미래를 여는 한일기본조약치고는 졸속으로 추진한 불철저한 것이었지만 우리에게는 1·2차 계획에 필요한 재원확보를 위해 10년간 무상원조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 규모의 대일 청구권 자금의 조속한 도입이 너무나 절실했다. 

1964년 대학 입학 당시 1인당 국민소득 77달러로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 모두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한 조국근대화에 목숨을 걸고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며 피와 땀을 흘리고 있던 때에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게 된 것은 선택 받은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다. 나는 선택받은 농대생으로서 우리 농의 발전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새삼 깨우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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