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 최양부

GATT의 UR 농업협상에서 한국과 일본은 쌀 시장개방 예외를 관철해야 하는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아즈마 일본 대표와는 자연스럽게 동지적 관계가 되었다. 일본은 미국, EU, 캐나다와 함께 UR 농업협상 그룹에서 4강(强)을 형성하고 있어 우리가 근접하기 어려운 협상 동향 등에 관한 고급 정보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쌀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 공조하며 ‘2인3각’ 경기를 시작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며 틈나는 대로 미국 등 수출국들이 주장하는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론’은 ‘세계 농업을 하나의 농업’으로 간주하는 비현실적 주장이라며 서구의 밀 중심 밭 농업과 아시아의 쌀 중심 논 농업의 차이를 역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일본과의 차별화였다. 일본과 협력하여 쌀에 대한 예외조치를 받더라도 일본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농업 개도국‘의 지위를 인정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일본과 공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EU 등에 우리 농민은 일본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특히 우리가 일본보다 농가소득 가운데 농외소득의존도가 매우 낮고, 쌀에 대한 소득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GATT 관계자와 제네바 주재 주요국 협상 대표 등을 초청하여 오찬을 같이 하면서 우리 농업과 쌀 산업의 특수성 및 일본과의 차별성에 관해 설명했다. 나는 마침 안식년 동안 일본에서 공부하며 정리했던 한ㆍ일간의 농업발전격차 비교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일본 도쿄에서 열린 UR 농업협상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미국 농무성의 다니엘 섬너 차관보(UR 농업협상 평가 담당)와 대화를 위해 일부러 워싱턴을 방문하여 그에게 한국과 일본농업의 차이를 설명하고 한국 농업에 대한 개도국 우대조치 불가피성을 설득한 것이다. 나는 그를 한국에 초청하는 등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10월로 접어들면서 던켈 총장이 주도하는 UR 농업협정문 최종안 초안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쌀에 대한 특례조치를 요구하는 우리 뜻을 GATT와 미국을 비롯한 협상 상대국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했다. 나는 사활이 걸린 쌀 생산 농민들의 적극적인 반대 의사표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1991년 10월 18일 마침 UR 농업협상 반대 의사를 전하기 위해 제네바를 방문한 한호선 농협중앙회장과 오찬을 같이하면서 나는 의례적인 GATT 항의 방문보다는 ‘쌀시장개방 반대 서명운동’ 같은 적극적인 농민 반대 운동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내 생각을 말했다. 한 회장이 이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앞장서면서 농협은 1991년 11월 11일부터 “쌀시장개방반대 범국민 서명운동”을 펼친 결과 서명을 시작한 지 불과 42일 만에 1,300여만 명에 달하는 서명을 받았다. 농협은 한국 국민의 쌀시장개방 반대 서명부를 GATT에 전달했다. 농협의 서명운동은 최단 시일에 가장 많은 서명을 받은 기록을 인정받아 1992년 세계 기네스북에 오르기까지 했다.

1992년 GATT는 UR 협정문 법제화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남은 최대쟁점인 미국ㆍEU 간 농업과 서비스 분야 양자 협상을 마무리 짓고, 한국과 일본의 쌀 문제도 매듭지어야 했다. 세계는 미국과 EU의 협상 타결을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1992년에는 UR 농업협상위원회가 거의 열리지 않아 내가 제네바에 가는 일은 없었으나 국내에서 UR 농업협상 전망과 향후 대책 등에 대한 각종 토론회에 참석하는 한편 언론 기고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나는 조경식 농림수산부 장관 자문관직을 수행하면서 2년 임기의 부원장직을 연임했다.

우리 언론들은 UR 협상이 이제 마무리단계로 접어들었다며 ‘쌀 시장개방 대세론과 불가피론’을 제기했다. 사실 언론들은 UR 협상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대세론과 불가피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1990년 7월 ‘드쥬 의장 초안’이 나왔을 때도, 1990년 12월 브뤼셀 장관회담 때 ‘헬스트롬 안’이 나왔을 때도 그랬다. 언론들은 던켈 총장의 UR 협정문 최종안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쌀 시장개방 예외는 물 건너간 것 아니냐, 우리 같이 ‘작고 힘없는 나라’가 어떻게 대세를 거스를 수 있으며, 무슨 수로 쌀 시장개방 예외를 받아낼 수 있느냐라고 썼다. ‘미국 등으로부터 양자적 압력과 보복을 당하기 전에 대세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협상 자세가 아니냐’라는 것이 대세론자와 불가피론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맞서 나는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쌀 시장개방문제는 국가적 차원의 역사적 결단이 필요한 문제이며 회색적 대세론이나 불가피론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힘없고 작은 나라라는 자기비하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세론과 불가피론에 맞서며 대응했다. 사실 정부 협상대표단에 대세론이나 불가피론을 주장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개방파와 UR 농업협상 결사반대만을 외치는 반대파에게 협상 목표나 전략을 협상 전에 설명하고 공개하는 것은 어려운 일로 관계자들을 이해시키는 일은 대외협상 못지않게 힘든 과제였다. 더욱이 UR 농업협상의 타결을 위해서는 ‘모든 농산물의 예외 없는 시장개방’이란 UR 농업협상의 대원칙에 맞서는 우리의 ‘쌀시장개방 반대’가 어느 지점에서는 GATT와 타협점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예외 없는 원칙은 없다’라는 기적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을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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