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농부가 되고 두 해쯤 지났을까? 식구들에게 “십 년 차가 되는 해에 농사 안식년을 가질 거예요. 땅도 쉬고 나도 쉬고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을 하고부터 안식년에 대한 생각이 늘 마음 한쪽에 있었다. 십 년 농사지었으면 한 해쯤 삶을 쉬어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해가 십 년 차가 되는 해다. 그래서 안식년을 가지느냐고? 이미 토마토, 가지, 고추 모종이 자라고 있다. 씨감자 산광최아를 했고, 이제 감자밭에 거름을 넣으려고 한다. 농지를 사고, 집을 지으며 빚을 질 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안식년을 가지지 못하겠구나.’ 빚을 갚으려면 더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생각보다 십 년이 빨리 지나갔다.

쉬어갈 생각을 가졌던 해라서 그런 걸까? 봄이 오면 밭에 나가고 싶어 들썩거리던 궁둥이가 올해는 무겁기만 하다. 볼에 닿는 따스한 봄 햇살이 반갑지 않다. 왜 농사가 즐겁기보다 무겁게 느껴질까? 나는 더는 농사를 짓고 싶지 않은 걸까? 좋아서 신나게 지어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이런 마음으로 한 해 농사를 지어낼 수 있을까? 생각이 많은 봄이다.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좋아하는 일이라고 늘 신날 수 있어? 십 년이면 이제 지칠 때도 됐지.” 한다.

2월 중순쯤, 무거운 궁둥이를 간신히 떼어 씨앗을 챙겼다. 먼저 심을 씨앗과 나중에 심을 씨앗을 나누었다. 가장 먼저 모종을 내는 토마토, 고추, 가지 씨앗을 심으면서 기도했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말이다.

아직 제대로 된 비닐하우스가 없어 따뜻한 기온을 좋아하는 가짓과 작물들은 거실에서 모종을 키운다. 다행히 우리 집 거실 깊숙이 햇볕이 들어 모종을 키우기 좋다. 토마토, 고추, 가지랑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혼자 살던 집이 복작복작해졌다.

씨앗을 심고 흙이 마르지 않게 물을 주었다. 사흘이 지나니 토마토 싹이 올라왔다. 모종은 뽀독뽀독 뿌리를 내리고 부지런히 줄기와 잎을 키워 간다. 모종을 키울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 그런지 자꾸 눈길이 간다.

하루는 잘 자라던 모종 잎이 아래로 돌돌 말리며 쳐졌다. 왜 그럴까?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흙을 만져 보았다. ‘물을 많이 줬나?’ 싶었다. 물을 주지 않고, 흙과 모종 상태를 확인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올 수 있게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켜 주었다. 다음 날, 아래로 말린 잎이 다시 활짝 펼쳐졌다. 물을 주지 않았는데도 흙이 아직 촉촉했다. 그동안 물을 많이 주었구나 싶었다. 물을 주는 양을 조금 줄이니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십 년째 농사를 지어도 늘 새로운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래도 이제는 작물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채는 눈치가 생겼다. 

작은 포트에 옹기종기 키우던 모종을 큰 포트로 옮겨 심었다. 뿌리를 뽑아 옮겨 심다 보니 잎을 축 늘어뜨리고 몸살을 하고 있다. 포트 아래 물을 대어 두면 모종들은 부지런히 몸을 일으킨다. 내일 아침이면 꼿꼿이 서서 나를 반겨주겠지. 식물들은 언제나 주어진 시간을 살아 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식물이 삶을 살아 내는 힘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

모종이 시들면 안절부절못하고, 다시 잎을 펼치면 내 마음도 활짝 핀다. 이렇게 마음이 피는데 어떻게 농사를 포기할 수 있을까. 모종을 돌보면서 알았다. ‘친구 말처럼 지친 거였구나. 농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잠깐 쉬어갈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씨앗을 심고 돌보듯이 내 마음도 잘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내 곁에서 살아갈 작물들처럼 나에게도 이 시간을 살아 낼 힘이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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