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오랜만에 밭에서 일을 하니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흥이 나서 고춧대를 뽑고 있는데 앞집에 사는 할머니가 길을 지나가셨다. 가던 걸음을 멈추시고 “올해도 집에 있나?”하고 물으셨다. “네. 올해도 집에 있지요. 이제 농사지을 준비하려고요.” 할머니는 내 대답에 “아이고, 고맙다”라고 하셨다.

얼굴에 닿는 햇살에서 봄이 느껴지고 며칠 사이 날씨도 아주 포근해졌다. 지난해 받은 씨앗을 펼쳐 놓고 씨앗 목록을 만들었다. 긴긴 장마와 때 아닌 냉해와 가뭄 가운데도 무사히 영글어준 씨앗이었다. ‘수비초(매운 토종 고추), 토마토, 늦옥수수, 오이, 긴호박, 동부콩….’ 씨앗 이름을 하나하나 쓰면서 이렇게 살아 남아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했다. 씨앗을 심을 생각에 마음이 설렜지만, 올해는 어떤 날씨를 겪으며 농사를 지어야 할까 하는 걱정이 바짝 뒤따랐다. 며칠 전, 토마토와 수비초, 파프리카와 가지 씨앗을 상토에 심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연둣빛 새싹이 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설렘과 걱정이 함께 피어나는 봄이지만, 언제나처럼 농부들은 씨앗에 싹을 틔우는 일부터 시작한다.

오늘은 지난해 겨울에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고춧대를 뽑았다. 얼었던 땅이 녹았는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고춧대가 쏙 뽑혔다. 땅속에도 봄이 왔구나 싶었다. 봄이 다가오니 눈길과 발길이 밭으로 향한다. 뒹굴뒹굴 한껏 게으르고 싶었던 겨울이 지나고, 내 안에 다시 움직이는 힘이 느껴질 때면 고마워진다. ‘내 몸이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구나’하고 말이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며칠 전, 이웃 마을에 사는 봄날샘한테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예슬아, 어디고?”, “밭에 있어요.”, “그렇나. 봄이 오니까 이제 막 몸이 근질근질하제? 나도 글타. 어제오늘 밭 정리한다고 바빴다.”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표현이 재미있었다. 정말 딱 그랬다. 아무리 방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있어도 괜찮았던 겨울과 달리, 봄이 다가오니 궁둥이가 들썩거렸다. 농부는 가장 먼저 봄마중을 나가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오랜만에 밭에서 일을 하니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흥이 나서 고춧대를 뽑고 있는데 앞집에 사는 할머니가 길을 지나가셨다. 가던 걸음을 멈추시고 “올해도 집에 있나?”하고 물으셨다. “네. 올해도 집에 있지요. 이제 농사지을 준비하려고요.” 할머니는 내 대답에 “아이고, 고맙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농사일은 평생 해 봐도 끝이 없드라. 다 할라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맹큼만 해야 한다”하고 덧붙이셨다.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셨다. 문득 할머니의 ‘고맙다’는 인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던 걸까? 궁금했다. 그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산골 마을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짓는 젊은이에게 보내는 응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 하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라는 그 말씀이 왠지 홀가분하게 들렸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할머니 말씀을 듣고 마음이 홀가분한 걸 보면, 봄 농사를 준비하며 나도 모르게 한껏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지치지 않고 하는 게 중요했다. 농사를 시작하는 나에게 필요한 따스한 봄 인사였다.

끈으로 단단히 묶은 고춧대 뭉치를 마당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일을 마치고도 햇볕은 여전히 따스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엔 아까운 날씨였다. 나무로 촛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요즘은 저녁마다 초를 피워 놓고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장 위로 일렁이는 불빛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기를 쓰는 시간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몰랐던 마음을 알아채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곤 했다. ‘그랬구나’하고 내가 나를 토닥여 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찬찬히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며 하루를 닫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촛대로 만들 자투리 나무와 톱, 조각칼과 사포를 챙겨 햇살이 가장 오래 드는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가만히 나무 조각을 들여다보며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생각을 마치고 톱질을 시작했다. 톱질 몇 번에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톱으로 자르고, 조각칼로 모양을 넣고, 사포로 다듬다 보니 어느새 차가운 저녁 공기가 느껴졌다. 무언가 만드는 작업을 할 때면 눈 깜짝할 새 시간이 흐른다.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촛대를 완성했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집 안으로 들어오니 맛있는 냄새가 났다. 엄마가 미역국을 끓이고 계셨다. 손을 보태어 저녁밥을 차리고, 식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몇 시간을 꼬박 깎아 만든 촛대를 식구들에게 자랑했다. 뿌듯함을 숨길 수 없었다. 모양이 조금 삐뚤하기는 했지만 삐뚤해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나무 촛대 위에 피운 촛불이 더 따스해 보였다. 일기를 다 쓰고도 한참 동안 촛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밭에서 만났던 할머니 생각이 흘러갔다. 필요한 걸 손으로 만든 날은 마음이 여유롭고, 넉넉해진다. 이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 따스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랐다. 감자밭을 일구기 시작하면 밭에서 하루를 보내야 할 날이 많아질 테니, 마당에 앉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봄날을 부지런히 누려보기로 했다. 엊그제 심은 씨앗에 연둣빛 새싹이 자라나길 기다리면서.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