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기후위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기후위기에 위태로운 농민의 삶에도 책임이 있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그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나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이 있다면 행동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부탁드린다.

올해 장마는 지금까지 가장 길었던 장마로 기록되었다. 핸드폰에서 날마다 몇 차례씩 호우주의경보가 울려댔다. 토마토는 다 녹아버렸고, 고추는 달린 채로 물러터지고 탄저병까지 들었다. 콩밭은 쏟아지는 빗물에 흙이 쓸려가 홍해 갈라지듯 땅이 깊이 파였다. 비가 쏟아지던 날, 우비를 입고 밭에 갔다. 점점 더 깊이 파이는 땅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혹시 아래 논으로 둑이 무너져 버리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흙이 더는 깎여 내려가지 않게 삽으로 물길을 더 깊이 파내고, 언덕에는 주워온 돌을 깔았다. 하지만 계속 쏟아져 내려오는 빗물 때문에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누군가 “합천에 피해가 크다던데 괜찮아요?” 하고 안부를 물으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네. 저희는 괜찮아요.” 하는 수밖에. 한 해 농사를 몽땅 포기해야 하는 농부도 있고, 누군가는 삶터가 통째로 물에 떠내려가 버렸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일상이 무너져 버린 사람들 앞에서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마음조차 미안하다.

긴 장마가 지나고, 이제는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비가 그친 지금도 지구의 주의보는 계속되고 있다.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 사람뿐만 아니라 농작물도 맥을 못 춘다. 새벽 일찍 일어나 밭에 간다. 무너진 둑을 다시 쌓고, 풀을 매고, 병든 농작물을 걷어낸다. 할 일은 많은데 오래 일하기는 힘들다. 오전 8시쯤이면 떠오른 해가 등을 따끔따끔 찌르기 시작하고, 11시가 가까워지면 머리가 아득해질 만큼 햇볕이 뜨겁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괜찮을까?’ 농사짓는 친구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나에게 물어오는 안부에 ‘괜찮다’ 할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이렇게 안부를 묻는 것뿐이다. 밭과 작업장이 모두 물에 잠겨 버린 친구는, 어디서부터 무얼 어떻게 손대야 할지 몰라 모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라 했다. 모든 농민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지친 마음을 돌아볼 틈조차 없다. 이제 장마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며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날씨가 무겁게 어깨를 누른다.

SNS에서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 위기입니다.’라는 글을 보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기는 한 걸까? 자본주의와 스펙 쌓기라는 치열한 경쟁도 모자라, 젊은 세대를 절망하게 하는 카테고리에 ‘기후위기’까지 더해졌다. 어쩌면 경쟁과 스펙은 어떤 삶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피해갈 수도 있다. 지금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내 삶이 경쟁과 스펙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다른 길 가운데도 자본에 발목이 잡힌다. 더구나 기후 위기는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미래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다. 막막한 마음 때문인지, 뜨거운 날씨 때문인지 숨쉬기가 힘들다. 우리는 무사히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다시 힘을 내기에는 아무래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친구 말에 마음이 먹먹하다.

아직 질척한 밭에 장화를 신고 들어갔다. 오크라와 가지, 옥수수와 깻잎. 폭우 속에서 살아남은 작물을 조심스레 수확했다. 토마토는 겨우 한 알 건졌다. 그리고 빨갛게 익은 고추를 땄다. 멀리서 볼 때는 ‘그래도 잘 버텼구나.’ 했는데……. 고추를 따려고 가까이 가보니 괜찮지가 않다. 성한 고추가 거의 없어서 건조기에 넣기 전에 상한 부분을 이리저리 오려냈다.

마음이 축 가라앉아 고추를 따는데, 고추 옆에 심어놓은 들깨 향이 났다. 비를 흠뻑 맞아서 조금 차분해진 향기였지만 산뜻하고, 고소하고, 달달한 들깨 향기가 났다. 쏟아지는 폭우에 많은 것이 쓸려가 버린 세상에서 선명한 들깨 향기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기후 위기가 우리 모두의 일이듯, 자연에 기대어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의 삶도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엉망이 된 농장을 다시 고치는 일이, 비가 그친 뒤에 찾아올 온갖 병충해를 당해내는 일이 농부가 외롭게 감당해야 할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후위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기후위기에 위태로운 농민의 삶에도 책임이 있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그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나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당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이 있다면 행동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부탁드린다.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안전한 곳에서 일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데 해마다 농민들은 자연재해로 생명을 잃는다. 이상기후는 끝날 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진 폭우도 올해만의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기후위기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일은 농부의 삶터와 일터를 지키는 일이고, 농부들이 안전하게 일하며 살아갈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긴긴 폭우를 겪고도 아직 향기를 잃지 않은 들깨처럼 우리도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꾸역꾸역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산뜻하고, 고소하고, 달달한 향기를 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