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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여성 농민들이 보내는‘마녀의 계절’

[한국농어민신문]

김예슬 청년농부·경남 합천

‘마녀 의 계절’은 농산물을 잘 가꾸는 것만큼이나 꾸러미와 함께 보낼 이야기를 담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농사를 짓고부터 나에게 봄이 꽃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처럼, 농민이라서 느낄 수 있는 계절의 흐름이 있다. 마녀의 계절을 통해서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본 계절을 사람들에게 전해보려고 한다.


지난겨울과 봄 사이, 씨앗 심을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지난해 여름, 충남 홍성에서 열린 ‘농촌 청년 여성 캠프’에서 만난 ‘이슬’이었다. 이슬은 나에게 친구들과 함께 기획하기 시작한 ‘마녀의 계절’이라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마녀의 계절은 ‘청년 여성 농민들이 제철 농산물을 담아 보내는 꾸러미’다. 그 꾸러미를 혼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봄 마녀, 여름 마녀, 가을 마녀들이 저마다 자기 계절에 맞추어 꾸러미를 보낸다. 누가 가을 마녀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같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재미있을 것 같았고, 청년 여성 농민들과 연결고리가 생긴다는 것이 좋았다. 정성껏 농사지은 농산물을 고마운 마음으로 먹어 줄 소비자를 만나고, 농산물에 담긴 계절 이야기를 함께 전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아주 신중한 편이다. 내가 이 일을 꾸준하게 할 수 있을지, 즐겁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아진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빠른 결정에 내 속이 다 시원할 정도였다. 때로는 생각이 많은 내 성격이 답답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녀의 계절은 ‘어떻게 농산물을 잘 팔 수 있을까?’하는 내 고민과 잘 닿아 있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농사짓는 달래, 전북 진안에서 농사짓는 이슬, 경남 합천에서 농사짓는 서와, 충남 홍성에서 농사지으며 논밭상점을 운영하는 들. 여성 농민 네 명이 모였다. 지금은 봄 마녀인 달래가 강원도에서 꾸러미를 보내고 있다. 모두가 처음 해보는 일이라 올해는 가볍게 시작해 보기로 했다. 논밭상점을 통해 주문을 받아 주마다 적게는 세 개, 많게는 열 개씩 꾸러미를 보낸다. 다양한 농산물을 때에 맞추어 수확하고, 구성을 맞추어 포장하려면 일손이 많이 든다. 먼저 해 보고 경험이 쌓였을 때 꾸러미를 늘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마녀의 계절’은 농산물을 잘 가꾸는 것만큼이나 꾸러미와 함께 보낼 이야기를 담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농사를 짓고부터 나에게 봄이 꽃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처럼, 농민이라서 느낄 수 있는 계절의 흐름이 있다. 마녀의 계절을 통해서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본 계절을 사람들에게 전해보려고 한다.

계절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밥상’이다. 봄에는 냉이와 쑥을 넣어 끓인 국에 조물조물 부친 취나물, 초장에 폭 찍어 먹는 두릅이 밥상에 오른다. 달래 간장에 콕 찍어 먹는 부추 부침개도 향긋한 봄을 느끼게 해 준다. 여름에는 포실한 감자를 찌기만 해도 맛있고, 토마토, 가지, 오이, 옥수수와 같은 풍성한 농산물이 나온다. 식구들끼리 다 먹기 어려울 정도라 나누어 먹기도 하고, 겨울 양식을 위해서 말려두기도 한다. 가을에는 밥상이 단풍처럼 다양한 빛깔로 익는다. 붉은 수수와 알록달록 콩을 넣어 지은 밥, 여름 더위를 이겨낸 보랏빛 고구마, 그리고 노랗게 잘 익은 늙은 호박으로 부침개를 부쳐 먹으면 진하고 달달한 가을이 느껴진다. 겨울에는 무국을 뜨끈하게 끓여 먹고, 여름과 가을에 말려둔 가지, 고구마순, 박으로 나물을 무쳐 먹기도 한다. 폭폭 삶아서 따뜻하게 갈아 마시는 콩국은 속을 든든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제는 ‘제철’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원하는 농산물을 사 먹을 수 있다. 그만큼 계절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적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녀의 계절은 밥상에서 계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계절을 돌려드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건강하게 길러진 농산물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가득하다. 그보다 더 크고 신비한 마법이 세상에 또 있을까?

가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일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여서 생각을 조율해 가는 과정이 늘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녀의 계절’을 함께 해 가면서 많은 힘을 받고 있다. 농촌에서 잘 살아보기 위한 고민을 나누는 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농민은 작물들이 제 모양과 맛을 잃지 않도록 가꾼다. 하늘이 하는 일을 가만히 받아들여야 할 때도 많다. 다양한 빛깔과 모양, 맛을 가지고 자라는 생명을 많이 경험하고, 느끼는 자리다. 그래서 나는 ‘마녀의 계절’을 잘 일구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자기 멋을 가지고 있지만, 그 멋과 생각을 조화롭게 어울려갈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울타리 콩이 자랄 울타리를 세우고, 비를 기다렸다 고구마를 심고, 호박에 달려드는 벌레를 쫓아 주며 가을 마녀가 되어 꾸러미에 담을 농산물을 부지런히 가꾸고 있다. 농사가 잘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 또한 자연에게 맡겨야 하는 농민의 자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담아 꾸러미를 보내게 될까 생각하면 저절로 힘이 난다.
시작하는 첫 걸음이라 서툰 점도 많다. ‘마녀의 계절’만으로 안정된 수입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저마다 또 다른 수입을 만들며 삶을 일구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마음 설레는지 모른다. 다음해, 다다음해에 마녀의 계절이 어떤 모양으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우리의 연결 고리가 계절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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