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기후위기는 지구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 같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우리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이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틈이 없기 때문이다. 몰려오는 쓰나미가 우리를 얼마나 더 기다려줄지 모를 일이다.

대한(1월 20일)이 지났다. 요즘은 겨울이 깊어간다는 느낌보다 다가오는 봄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아직은 마음 놓고 늦잠을 자곤 하지만, 조금씩 몸을 깨울 준비를 해야겠다.

겨울 동안 한 해 농사를 계획한다. 지난해에 받은 씨앗을 정리하고, 어디에 무얼 심고, 거둘지 찬찬히 짚어본다. 작물끼리도 서로 잘 어울려 자라는 짝꿍들이 있다. 책을 펼쳐 놓고, 이런저런 공부를 해 가며 밭 지도를 그린다.

우수는 ‘언 땅이 녹는 때’다. 우수가 지난 2월 중순쯤이면 가장 먼저 가지와 고추, 토마토 씨앗을 심는다. 해마다 모종을 키워야 할 때가 되면 고민이 많아진다. 땅을 살리는 농사를 짓고 싶고 자연스러운 농사를 짓고 싶다. 그런데 한 해 농사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플라스틱 포트에 상토를 채우는 일이다. 플라스틱 포트를 한 해만 쓰고 버리지는 않는다. 내 경험으로 적어도 이삼 년 정도는 쓴다. 모종을 키우고, 심을 때 되도록 포트가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오래 쓰고 싶은 마음과 달리 얇은 플라스틱 포트는 쉽게 깨지고 찢어지고 만다.

‘플라스틱 포트를 쓰지 않고 모종을 키울 수는 없을까?’ 농사지으며 꽤 오랫동안 해온 질문이다. 해마다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고 있다. 집에서 쓰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통과 우유팩에 구멍을 내어 심어 보았다. 모종은 잘 자라주었지만, 플라스틱 통을 자르고 구멍을 뚫는데 꽤 많은 시간이 들었고, 크기가 제각각이라 자리 차지도 너무 많이 했다. 계란판에도 심어 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흐물흐물해졌고,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모종을 뽑아 쓰기도 어려웠다. 뿌리가 계란판을 꽉 붙잡고 자랐기 때문이다. 한창 작물을 많이 심는 4월에는 밭가에 버려진 포트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쓸 만해 보이는 것들을 주워 와서 6월에 콩 모종을 만들 때 쓰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작은 토분 60개를 샀다. 좋은 대안이라 생각했다. 깨지기 전까지는 계속 쓸 수 있고, 깨진다 해도 다시 흙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모종을 다 심기에 60개는 턱없이 부족한 개수였지만, 한꺼번에 사기에는 너무 비쌌다. 또 써보아야 쓰임이 괜찮을지 알 수 있었다.

토분을 쓰면서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이 많았다. 플라스틱 포트 한 판이면 32칸, 105칸에 상토가 척척 채워지는데, 토분은 하나하나 상토를 따로 담아야 했다. 그리고 토분을 다 펼쳐 놓고 물을 주려면 꽤 넓은 자리가 필요했고, 옮겨가며 쓰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고민하며 여러 시도를 해 보았지만 플라스틱 포트를 대신할 만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씨앗의 다양성을 지키고 이어가기 위해서는 씨앗을 심고, 가꾸고, 다시 씨앗을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농부들은 씨앗을 지켜간다. 씨앗을 심고 가꾸는 모든 과정은 지구와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는 일이어야 한다. 이 소중한 과정과 쉽게 쓰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포트는 어울리지 않는다. 

며칠 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친구들과 나는 플라스틱 포트를 대신할 것을 찾아온 지난 실험을 공유했다. 그리고 플라스틱 포트를 쓰면서 무엇이 가장 불편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쓸모에 불편함을 느낀 것보다 계속해서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을까?

지피포트처럼 생분해가 되는 제품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반영구로 쓸 수 있는 튼튼한 플라스틱 포트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영구 포트 제품이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으로나마 선택지를 늘려보았다. 지피포트는 재활용이 어려워 계속 생산을 해야 한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재료를 쓰는 것도 좋지만, 생산할 때 드는 에너지를 생각하면 반영구 포트가 훨씬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미 버려진 플라스틱도, 앞으로 버려질 플라스틱도 무궁무진하게 많다. 우리 고민은 ‘그 플라스틱들을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하는 질문에 닿았다. 플라스틱을 재활용해서 튼튼한 모종 포트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모였다.

기후위기는 지구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 같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우리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필요하다. 이제 더 이상 ‘이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틈이 없기 때문이다. 몰려오는 쓰나미가 우리를 얼마나 더 기다려줄지 모를 일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농민들이 있다. 다른 선택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당장 플라스틱을 없앨 수 없다 하더라도, 분명 순환 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되게 하고, 쉽게 버려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 개인이 실험하고, 시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실험하고, 시도하고,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업과 단체에서, 그리고 그런 구조를 만들 수 있는 정부에서 나서야 할 일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오늘도 자기 자리에서 온힘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가올 봄,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다음 봄에는 마음 놓고, 흔쾌히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우리에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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