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아스팔트 농사라는 말이 있듯이 농부는 땅만 가꾸고 살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백남기 농부님도 밀농사를 미루어 두고, 아스팔트 농사를 지으러 나섰을 것이다. 나도 내가 낼 수 있는 만큼의 소리를 내는 농부가 되어 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을길을 막아 두고 아스팔트 공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왜?’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고,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게 전부인 마을길에 아스팔트를 깔 필요는 없었다. 시골에도 점점 흙을 밟을 수 있는 땅이 사라지고 있다. 논밭이 아닌 곳은 거의 다 농기계가 다니기 좋도록 시멘트를 깔아 놓았다. 이제는 시멘트로도 모자라 아스팔트까지 깐다. 사람들이 내는 길만 보아도 세상이 무엇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편리, 효율,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없어서는 안 될 생명들이 설 땅은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는 사이에 ‘세월호’라는 엄청난 아픔까지 겪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이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돌아오는 봄날마다 그 빈자리를 어떻게 견딜까?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채 세월이 많이 흘렀다. 농부인 나는 그런 야속한 봄날에도 밭으로 간다. 때에 맞추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려고 머릿속은 농사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면 세월호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4월을 보내기도 한다. 활짝 핀 꽃을 보며 밭에 갈 생각에 마냥 설렜던 날도 많았다. 어쩌면 봄을 맞이한 농부에게 자연스러운 마음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나와 마주할 때면 부끄러워진다.

얼마 전 있었던 제주 4.3 사건 추모식 때,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폭력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사를 하며 하신 말씀이다. 그 말에 콧등이 시큰했다. 긴 세월 속에 묻힌 진실을 하나씩 밝혀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도 생겼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4.3 사건과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4월만이 아니다. 5월에는 광주 시민들이 죽음에 내몰렸고, 6월에는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1970년 11월에는 노동운동을 하던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고, 2015년 11월에는 민중총궐기에 나갔던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고 쓰려져 세상을 떠났다. 민주를 위해 이름도 없이 맞섰던 수많은 사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과연 내가 지킬 수 있는 평화가 무엇일까? 산골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는 것이 어떤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와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겪으면서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한 번씩 서울에 가서 촛불과 피켓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산골 마을에서 서울까지 자주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더구나 날마다 해야 할 농사일이 있어 마음만 아팠다.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리에서 이따금씩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일, 함께 기억할 수 있도록 이렇게 글을 쓰는 일뿐이다. 이름도 없는 산골 청년농부가 쓴 글을 몇 사람이나 읽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 명이라도 더 내 글을 읽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함께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렇게 글을 쓰고,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 촛불을 들면서 작은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농부가 되고부터다. 예전엔 거대한 권력이 평범한 삶을 짓밟을 때마다 화가 나고 가슴이 시렸지만, 마음속으로 때론 식구들한테 푸념을 늘어놓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스팔트 농사라는 말이 있듯이 농부는 땅만 가꾸고 살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백남기 농부님도 밀농사를 미루어 두고, 아스팔트 농사를 지으러 나섰을 것이다. 나도 내가 낼 수 있는 만큼 소리를 내며 농부가 되어 가고 있다.

사람도 자연이라 저마다 다른 씨앗이 있다고 믿는다. 그 씨앗이 온전한 생명으로 싹트고, 가꾸어지고, 피어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온 생명과 어울려 따스한 햇볕을 받고, 함께 농사지어 밥을 나누어 먹고사는 것. 내일도 오늘처럼 더불어 살아 있음을 느끼며 사는 것. 내게는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평화이다. 그 삶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아무리 작은 소리라 해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행복한 길을 찾아 삶을 가꾸어 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킬 수 있는 평화라고 생각한다.

2018년 4월을 지나면서 세월호 참사, 제주 4.3 사건과 같은 일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주 4.3 사건 추념사에서 “4.3 사건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로 자리를 잡았다”라고 선언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함께 바뀌어 버리는 진실이 아니라 분명한 진실과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국민이 되고 싶다. 오늘도 밭에서 땅을 일구며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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