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젊은 아가씨가 우찌 농사를 지을라고”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오신 만큼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싶어 하는 말씀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다. “내가 원하는 일을 여자라는 이유로 다 포기해야 할까요?”


며칠 전, 작은 모임에서 내가 농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여자 몸으로 농사짓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앞으로도 계속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이 드나요?”라고 묻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물이 가득 찬 물 조리개를 드는 것도 힘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여자라서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일을 하던 몸이 아니니까 당연한 것이라 여겼어요. 농부로 산지 오년이 지났고, 지금은 꽤 일머리가 생겼어요. 처음보다 몸도 많이 단단해졌고요. 앞으로 제가 무얼 하고 살아갈지는 아무도 몰라요. 어쩌면 한 해쯤 농사를 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자연 가까이에서 살고 있을 거예요. 저는 자연에 있어야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느끼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지나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바쁜 농사철엔 몸이 지칠 때가 많다. 더구나 요즘처럼 숨 막히는 더위에 시들시들한 작물들을 볼 때면 마음마저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어느 농부에게나 힘든 일이다. ‘여성’에 대해 생각하니 지난달에 다녀온 캠프 생각이 난다.

7월 14일부터 15일까지 1박 2일 동안 충남 홍성에서 열린 ‘농촌 청년 여성 캠프’에 다녀왔다. 농촌에서 살고 있는 청년 여성들을 만나고 싶었고, 그분들은 어떤 질문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농촌에서 혼자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건 생각보다 더 답답하고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여자 혼자 시골에 살러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여자 혼자 뭣 하러 와”라는 소리를 아주 쉽게 했다. 여자 혼자는 온전한 마을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리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 결혼 할 사람은 있느냐”라는 질문들을 계속 받아야 했다. 때론 여자라서 무시당하거나 해코지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식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보니 그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부모와 함께 산다는 이유로 나를 독립된 한 사람으로 보아주지 않는다. 마을 어르신들은 나를 ‘동그란 돌집에 큰 딸’이라고 기억하신다. 지금껏 “니 이름은 뭐고?”라고 물어보는 어른이 없었다. ‘동그란 돌집에 큰 딸’로 내 소개가 충분하다는 것이 서글퍼질 때가 있다.

내가 처음 시골 마을에 들어왔을 때 “젊은 아가씨가 우찌 농사를 지을라고”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오신 만큼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싶어 하는 말씀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다. “내가 원하는 일을 여자라는 이유로 다 포기해야 할까요?”

농부가 되기 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다. 열여덟 살에 한옥 짓는 일을 배우고 싶어서 현장을 기웃거렸을 때에 “여자가 무슨! 이건 여자가 할 일이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었다. 옹기 만드는 기술을 익히고 싶었을 때에도 똑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행복한 일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여자라서 또는 남자라서 그 일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없다. 여자가 못할 일이 어디 따로 있을까? 그 현장에 여성이 있으면 그에 맞추어진 기술과 도구들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농촌 청년 여성 캠프’에서 ‘여자 혼자 시골에 살려면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장작 패기, 불 지피기, 겨울에 먹을 음식 저장하기, 씨앗 보관하기, 집 고치기, 트럭과 농기계 운전하기, 낫 갈기, 형광등 바꾸기, 이웃 이야기 잘 들어주기, 호신술 익히기와 같은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기술이라 하면 왠지 대단한 것이라 느껴지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많다는 걸 알았다. 겨울에 먹을 것을 말려 놓는 일, 이웃 어른들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일,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에 커튼을 다는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년 남짓 농사를 짓다 보니 외발 수레를 모는 일과 괭이질, 호미질과 삽질도 남자들 못지않게 잘한다.

문득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충분히 배울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던 일은 무엇이 있을까?’ 낫질과 낫 갈기, 나무하기와 장작패기, 아궁이에 불 때기와 같은 일은 남동생이나 아버지 몫으로 미루었다. ‘농촌 청년 여성 캠프’를 하면서 할 수 있지만 애써 하려고 하지 않았던 기술들을 익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을수록 자유로워지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걸 혼자 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사람은 누구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받는 도움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곁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시골에서 바람처럼 자유롭고, 별처럼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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