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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작은 자유
   
 

김예슬 청년농부·경남 합천

어릴 때부터 한 번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농부가 되고 보니 밭을 살 수 있는 만큼만 부자였으면 싶었다. 마음 놓고 농사지을 수 있는 밭 한 평 없다는 것이 슬프기도 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지만 그것을 지켜가기가 쉽지 않다.


농부가 되고 네 번째 겨울을 맞이했다. 황매산 자락에 있는 우리 집은 바람이 지나는 길목이라 다른 마을보다 유난히 춥고 바람이 세다. 엉덩이가 뜨뜻한 방에 앉아 창문 너머로 씨잉 씨잉 하고 들리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농부에게 겨울은 자연과 함께 쉬어가는 시간이다. 다른 계절은 대부분 밭에 있다 보니 겨울이 되어야 산책할 시간이 생긴다. 발가락까지 시린 날씨지만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잎사귀를 모두 땅으로 돌려보낸 나무, 수확을 마친 밭, 사람 드문 마을 길. 산골 마을 겨울은 참 고요하다. 길을 걷다가 우리 밭을 지나면 “이번 한 해도 고맙습니다”하고 꼭 인사를 한다. 땅을 일굴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우리 식구들이 먹을 열매를 내어주고, 꼭 써야 하는 생활비도 벌게 해주는 밭이니 인사를 안 할 수 없다. 겨울을 맞이할 때마다 땅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수 있는 농부가 된 것이 다행이고, 행운이다.

우리 식구는 내가 열아홉이 되던 겨울부터 시골에 살기 시작했다. 스무 살에는 조그만 텃밭을일구었고, 스물한 살에는 고구마농사 661m2(200평)을 지었다. 흙을 만지며 자연과 가까이 일하는 것이 좋았다. 생명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라면 내 삶을 들여 해볼 만한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람과 자연을 병들게 하는 농약과 화학비료, 비닐 따위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땅을 살리는 농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연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지만 미생물까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온 식구가 힘을 모아 3305m2(1000평) 남짓 되는 밭을 일군다.

땅을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렇다보니 밭이 이 마을 저 마을에 흩어져 있다. 여러 밭 가운데 가장 내 손길이 많이 닿는 곳은 바로 집 뒤에 있는 밭이다. 언제든 걸어서 갈 수 있다 보니 자연스레 그곳에 가서 풀을 매고, 울타리를 다듬고, 액비를 주었다. 발걸음이 가는 만큼 마음도 많이 갔던 밭이다. 하지만 이번 해부터는 밭주인 할머니 댁 사정으로 그 밭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삼 년 동안 그 밭을 가꾸면서 보이지 않던 지렁이가 이제야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는데…….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오랫동안 정성껏 맞추던 퍼즐을 와르르 쏟아버린 것만 같았다.

독한 농약과 화학 비료로 농사를 짓던 땅을 다시 살리려면 적어도 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밭들은 얼마나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곳이다. 해마다 부지런히 맞추던 퍼즐을 엎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이 일을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한 번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농부가 되고 보니 밭을 살 수 있는 만큼만 부자였으면 싶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농사지어서는 돈을 벌기 어렵다. ‘내가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을까?’ 생각하면 거대한 벽 앞에 코를 박고 서 있는 기분이다.

하필 지난해에는 가뭄 때문에 베어도, 베어도 쑥쑥 자라던 풀조차 잘 자라지 못했다. 땅을 사는 건 둘째 치고, 당장에 쓸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잘 이겨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이라는 돌이 자꾸만 떨어졌다. 누가 땅에 값을 매기고 주인을 정하기 시작했을까? 나 혼자 잘 살려고 하는 일도 아닌데, 마음 놓고 농사지을 수 있는 밭 한 평 없다는 것이 슬프기도 했다. 땅을 살리고, 자연을 회복시키는 일은 시골에서 애쓰며 살아가는 몇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함께 고민해야할 문제다.

청년농을 지원하는 사업들을 살펴보았지만 작은 평수의 밭에서 땅을 살리는 농사를 일구는 나에게 맞는 사업을 찾기란 어려웠다. 지원을 받으면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땅을 살리는 것에만 긴 시간을 들여야 하는 나로서는 당장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홈스쿨링을 했는데, 그때에도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에서 아무런 교육 지원을 받지 못했다. 적고, 작은 무리에 사람들은 보호와 지원이라는 울타리 바깥에 서게 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나는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 그런 내 꿈을 생각할 때면 길을 걷다가,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잠을 자려고 누워 있다가 문득 문득 눈물이 핑 하고 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지만 그것을 지켜가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작은 자유’라는 노래를 자주 듣는다. 노래 가사처럼 황당한 꿈이라고 해도 계속 꿀 수 있다면 좋겠다. 거창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작은 자유를 간절하게 붙잡고 싶다. 포기하지 않기를, 잃지 않기를, 꼭 지켜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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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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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윤정 2018-02-21 19:49:34
  • 가현정 2018-02-11 10:23:03

    정말 와 닿는 이야기, 농부가 맘 편히 농사 지을 수 있는 농지 확보는 가장 중요해요. 농촌에서 농부로 살아보니... 넓고 넓은 땅이 휴경되고 방치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경자유전의 원칙은.. 그저 법전에만 존재하는 걸까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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