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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여행하는 농산물 트럭

[한국농어민신문]

김예슬 청년농부·경남 합천

여행하는 농산물 트럭은 ‘자신이 먹는 농산물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기른 것인지 안다면 사람들이 농촌과 농부를 대하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성껏 기른 농산물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는지 아는 것도 농부에게 소중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 집은 해발이 높고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있다. 겨울이면 무엇이든 날려버릴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바람이 쌩쌩 불어온다. 우리 집에서 마을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 내려가도 온도가 다르게 느껴질 정도다. ‘씨잉 씨이잉’ 요란한 바람 소리가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담요를 몸에 두르고 앉아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몸이 나른해진다.

농부가 되고부터 몸도 자연에 맞추어졌다. 여름에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마다 눈이 번쩍 뜨이고, 몸도 가볍게 일으켜진다. 하지만 겨울에는 아무리 일찍 일어나려 해도 잠이 깨질 않는다. 겨울잠을 자야 하는 곰을 깨워 놓은 것처럼 낮에도 살짝 잠에 취해 있다. 이웃 농부님들이 몸이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거라고 하셨다. 다시 찾아올 봄을 위해서 말이다. 지난 봄, 여름, 가을 동안 농부로 사느라 고생한 나에게 충분히 쉬는 시간을 주고 싶다.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몸을 움직일 일이 적다 보니 생각하는데 시간을 많이 쓴다. 한 해가 저물고, 새해를 맞이하는 계절이라 더 그렇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았나?, 새해를 맞이하면서 나는 무엇을 새롭게 할까?’ 새해에 누구나 하게 되는 생각들이다.

지난해에 ‘사람책’과 ‘컨퍼런스’에 초대를 받아 사람들 앞에서 내 삶을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인터뷰도 몇 차례 했다. 그만큼 ‘농촌과 청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내 삶을 이야기 하면서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한 번씩은 사람들 시선에 그런 척, 아닌 척 하게 되는 일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실망스러웠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마음을 지켜가는 일이 쉽지 않다.

새해라고 내가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해라는 의미를 담아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박노해님의 ‘고난은 우리 영혼의 맥박이다’라는 시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있다.

“인정받을 것만 인정받고/ 인정받을 사람에게만 인정받고/ 삶이라는 선물과 우정을 맘껏 누려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인정받을 것만 인정받는 것도 용기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모자란 부분은 모자라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아는 척, 있는 척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사람 시선에 있다.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걱정이 불안이 되고, 나를 가두는 틀이 된다. 올해 나는 있는 그대로 조금 더 당당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는 만큼만 내면서 살아보려고 한다.

올해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다. 바로 ‘여행하는 농산물 트럭’이다. 말 그대로 내가 농사지은 농산물을 싣고 사람들을 직접 만나 판매하는 일이다. 농산물을 팔면서 농사를 지으며 쓴 글과 노래를 나누는 자리도 만들고 싶다. 함께 농사짓는 동생 수연이가 우리 이야기로 노래를 만든다. 노래를 짓는 동생 덕분에 ‘노래하는 농부 남매’로 한 번씩 공연에 초대 받기도 했다.

여행하는 농산물 트럭은 ‘자신이 먹는 농산물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기른 것인지 안다면 사람들이 농촌과 농부를 대하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성껏 기른 농산물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는지 아는 것도 농부에게 소중한 일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마트에서 비닐에 포장된 농산물을 보는 게 불편했다. 소비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농산물 트럭이라면 비닐, 플라스틱 같은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도 농산물을 팔 수 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하는 것이다. 농부로 살면서 자연과 가까워질수록 불편한 것이 늘어간다. ‘슉’하고 일회용 봉지를 뽑는 소리에도 양심이 쿡쿡 찔리니 말이다.

자연을 지키며 소농으로 살아가는 이웃 농부님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다. 농부에게는 농산물을 제값에 팔 수 있는 판로도 중요하다. 사실 농부는 농사 말고도 해야 하는 일이 많다. 특히 소농은 더 그렇다. 농사를 짓고, 수확하고, 상품이 되도록 다듬고, 포장하고, 택배를 보내는 일까지 농부 몫이다. 농산물을 홍보하는 일, 주문을 받는 일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요즘은 디자인까지 중요해지다 보니 농부가 갖춰야 할 덕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웃 농부님들이 농산물을 팔 곳이 없어 걱정하는 모습을 해마다 보았지만 힘이 되어 드리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늘 도움을 받는 쪽이었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이라 농산물을 얼마나 팔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힘이 닿는 만큼 농산물을 판매하는 부담을 덜어 드리고 싶다.

사실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계획해 오던 일이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이제는 새로운 걸음을 딛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하는 농산물 트럭’이 내 삶을 조금 더 든든하게 세우고, 내가 낼 수 있는 소리를 담아 가는 일이 되었으면 한다. 첫 걸음인 만큼 천천히, 모자라더라도 있는 그대로 ‘나다움’을 믿으며 걸어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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