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농부들은 해마다 이맘때 보릿고개를 넘는다. 농부에게 봄은 돈을 버는 일보다 쓸 일이 많은 철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농들에게 더 그렇다. 봄이 오면 유기농업에 쓰는 상토와 거름을 사야 하고, 씨감자와 생강 종자, 고구마 모종도 사야 한다. 또 다달이 내는 건강보험료와 갖가지 생활비도 필요하다. 돈벌이는 없어도 쓸 일은 줄을 서 있다.

고추, 가지, 오이와 같은 씨앗에 싹을 틔우고, 감자를 심으며 봄 농사를 일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하지만, 농부들은 때에 맞추어 부지런히 논밭을 오고 간다.

오늘 낮에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산골 마을에는 별일 없지? 가만 생각해 보면 이럴 때 농부가 참 좋아!’ 학교 급식이 멈추면서 어려움을 겪는 농부들이 있지만, 소농인 나는 여느 해와 다를 것 없는 봄을 보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럴 때 “농부가 참 좋다!”라는 친구 말이 한 편으로 맞는 말이다. 산밭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 언제나처럼 맑고, 고요한 하늘인데 올해는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진다.

온 세계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먹고사는 생활조차 힘겨운 사람이 많다. 정부에서는 ‘긴급 재난지원금’이라는 대책을 내어놓았다. 우리 모두 긴긴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농부들은 해마다 이맘때 보릿고개를 넘는다. 농부에게 봄은 돈을 버는 일보다 쓸 일이 많은 철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농들에게 더 그렇다. 봄이 오면 유기농업에 쓰는 상토와 거름을 사야 하고, 씨감자와 생강 종자, 고구마 모종도 사야 한다. 또 다달이 내는 건강보험료와 갖가지 생활비도 필요하다. 돈벌이는 없어도 쓸 일은 줄을 서 있다.

그래서 여섯 해 전부터 쑥차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웃 마을에 사는 은실 이모와 함께 하는 일이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거라며 나에게 쑥차 덖는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쑥이 얼마나 자랐나 싶어 나도 모르게 땅만 보고 걷게 된다. 그렇게 한동안 내 눈에는 쑥만 보인다.

봄에는 손수레에 거름을 실어 나르고, 삽질과 괭이질하며 밭을 일구느라 힘든 일이 많다. 그러다 가만히 앉아 쑥을 캐고 있으면 꼭 쉬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쑥을 캐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좋고, 손끝 느낌을 살려 차를 덖는 일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를 주고, 생활비에 보탬이 되는 고마운 일이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쑥이 쑥쑥 자라고 있다. 쑥을 캐다 보면 보랏빛 제비꽃도 만나고, 겨울잠을 자고 나온 청개구리도 만난다. 한 번씩은 멍하니 앉아서 매화꽃, 살구꽃, 목련꽃을 보기도 한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도 봄풀과 꽃들이 들녘을 가득 채워 주어 고마운 마음이 저절로 든다.

낮에 쑥을 캐고, 밤에는 티끌을 가리고 다듬는다. 해마다 쑥 캐는 손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밤 열 시가 넘도록 가리고 다듬어도 줄어들지 않은 쑥 보따리를 보면서 ‘언제 이렇게 많이 캔 거야?’하고 졸린 눈을 비비곤 한다. 쑥차를 만들 때는 새벽에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몸이 지칠 즈음 한 번씩 비가 내린다. 며칠 전에도 비가 내린 덕에 잠을 푹 잤다. 농부가 되고부터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 되었다. 쑥차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쑥차는 아홉 번을 덖어서 만든다. 이제 쑥을 덖는 일이 손에 많이 익었다. 차를 덖는 것은 시간이나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온전히 감각으로 익히는 일이다. 그만큼 내 것으로 익히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쑥차를 만든 지 여섯 해가 되어서야 차 덖는 감각을 조금 알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처음 쑥을 솥에 넣으면 상큼한 향기가 난다. 과일 향이랑은 조금 다르다. 새봄처럼 맑고 어린 향기이다. 그래서 처음 쑥을 덖을 때는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덖을수록 파릇파릇했던 쑥이 차분해지면서 향이 점점 깊어지고, 내 마음도 차분해진다. 따뜻한 날씨에 불 앞에서 차를 덖다 보면 등에서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끝과 향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봄마다 몸을 깨우는 공부를 하고 있다.

쑥차를 다 덖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감각을 살려 하는 일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은실 이모 집에서 쑥차를 덖고 포장하는 일까지 모두 마치면 삼십 분쯤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 은실 이모네 마을에서 우리 마을까지 벚꽃길이 이어져 있다. 따로 시간을 들이지 않고 꽃놀이를 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벚꽃길을 따라 걷다 보면 멍했던 몸이 환해진다. 토닥토닥 나를 위로해 주는 하얀 꽃잎들이 고맙다. 내가 누리는 환하고 따스한 봄이 쑥차에도 가득 담기면 좋겠다.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해마다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거뜬하게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어차피 넘어야 할 고개라면 ‘힘겹게’가 아니라 ‘즐겁게’ 넘어서고 싶다. 그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봄이라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꼼꼼히 누리다 보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기곤 한다. 다행히 나와 잘 어울리는 일을 하며 그렇게 조금씩, 길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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