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새로운 삶을 찾고 고민하는 청년이 늘어가고 있다. 농촌으로 눈길을 돌려보기도 하지만 ‘농촌에서 자립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발길을 막는다. 농촌이 무모한 선택이 되지 않으려면 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자립을 일군 청년이 늘어나야 한다.


10월 6일부터 9일까지, 남원시 산내면에서 ‘사회적 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맡아 하는 ‘지리산 포럼’이 열렸다. 전국 곳곳에서 지리산 품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질문과 이야기를 나눌지, 어떤 흐름을 만들어 갈지 궁금했다. 해마다 지리산 포럼이 열린다는 건 알았지만 가을걷이가 한창인 때라서 가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농부에게 10월은 늘 바쁠 텐데’하는 생각에 ‘그래, 고구마는 포럼에 다녀와서 캐면 되지!’하고 신청서를 썼다.

2018년 지리산 포럼은 ‘작은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주제로 열렸다. 삶터와 일터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많은 발표가 준비 되어 있었다. 자신이 가진 질문과 고민에 따라 흥미로운 주제를 선택해 듣는 방식으로 포럼이 이루어졌다. 지역과 도시를 잇는 ‘플랫폼 510’이야기, 지리산 자락에서 삶을 일구는 청년들 이야기, 청년이 농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실험하는 ‘팜프라’ 이야기. 나는 여러 발표 가운데 농촌과 청년 그리고 자립에 관한 이야기를 선택해 들었다.

한 번은 둥글게 둘러 앉아 각자 가지고 있는 질문을 가운데로 던져 놓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하는 질문을 공책에 받아썼다.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할까?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청년이 농촌에서 자립할 수 있을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짧은 이야기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도 아니고, 또 한 가지 정답이 있는 질문도 아니다. 이번 포럼에서 발표를 한 분들도 자기다운 모양으로 이 질문을 풀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 새 농사를 지은 지 5년이 지났다. 다섯 번 농사를 지어 본 것이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느낌이 묵직하게 든다. 씨앗을 심고 거두는 일이 익숙해 진만큼 많은 경험이 내 안에 쌓였다. 또 농부로 살면서 가지게 된 생각과 고민도 있다. 경험과 고민이 내 안에 녹아들었으니 이제 한 걸음 더 내딛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펼치는 상상을 넘어 현실이 되려면 조금 더 자세한 계획과 작은 시도를 해보는 용기가 필요했다.

새로운 삶을 찾고 고민하는 청년이 늘어가고 있다. 농촌으로 눈길을 돌려보기도 하지만 ‘농촌에서 자립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발길을 막는다. 아무런 기반 없이 낯선 농촌에 살겠다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될 테니 말이다. 농촌이 무모한 선택이 되지 않으려면 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자립을 일군 청년이 늘어나야 한다. 자연처럼 아름답고 다양한 모양으로 말이다. 농촌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먼저 살아온 만큼 내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첫 발을 잘 떼지 못한다. 그런 나에게 지리산 포럼은 이제 다음 걸음을 떼야 할 때가 되었다는 강한 소리가 되어 주었다. 작물은 계절에 맞추어 싹을 틔우고, 줄기를 키우고, 열매를 익혀간다. 작물처럼 나에게도 또 다른 계절을 맞아 새로운 줄기를 키워낼 힘이 자라 있었다. 새로운 걸음을 내딛어야겠다는 마음이 두려움 보다는 기대와 두근거림으로 느껴지는 걸 보니 말이다.

포럼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 고구마를 캐고 있다. 호미질을 하면 흙 속에서 자란 고구마가 보인다. 고구마가 다치지 않게 손으로 슬슬 흙을 걷어내고 뽑는다. 한 알 한 알 정성껏 고구마를 캐면서 내 안에서 자라고 있던 생각들도 하나씩 꺼내어 보고 있다.

‘다음 해에는 가까운 마을에 빈집을 빌려서 혼자 살아보면 어떨까? 부모님과 지낼 때보다 친구들이 편한 마음으로 놀러올 수 있을 거야, 놀러 오다보면 살아볼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지. 월세가 얼마면 살아볼 수 있을까? 나에게 맞는 집을 만날 수 있을까?’

‘식구들과 짓는 농사도 있지만 내 밭을 따로 빌려서 농사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혼자 농사를 짓는다면 무엇을 얼마나 심고, 어떻게 판매할 수 있을까? 농사짓는 이야기와 농부로 살아가는 의미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단순히 돈을 주고받는 관계를 넘어설 수는 없을까? 농사 말고도 배우고 싶고, 해보고 싶은 일이 많은데 어떻게 시간을 낼 수 있지? 농촌이라고 농사만 짓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닌데 말이지. 농촌에서 청년들이 어울릴 수 있는 문화를 어떻게 만들까? 상상을 넘어 삶이 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지? 혼자 힘으로 어려울 때에는 어디에 어떤 도움을 구해야 할까?’

고구마를 캐고, 콩과 수수를 베고, 부지런히 가을걷이를 하면서 내 안에 있던 질문들을 밖으로 꺼내보고 있다. 아마 끊임없이 질문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 질문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한데 잘 모아 두어야겠다. 그렇게 엮어낸 생각을 겨울동안 잘 다듬다보면 작은 씨앗 하나가 생기지 않을까? 그럼 따스한 봄이 왔을 때, 작은 씨앗을 심고 물을 흠뻑 줄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에 조그만 새싹이 피어날 수 있도록! 그렇게 새싹을 틔우고, 줄기를 키워내다 보면 함께 상상하고, 더불어 살아낼 동료도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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