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한국농어민신문]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깊이 고민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손으로 자연을 살릴 수도, 더 망가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땅을 살리고, 지구를 지키려는 청년 농부가 더 많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고구마를 캐기 시작하려고 했던 날에 큰 비가 내렸다. 결국 땅이 마르기를 기다리느라 며칠 늦게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다른 작물도 늦지 않게 거두어야 하는데 고구마를 캐는 내내 맑았다가 흐렸다가, 흐렸다가 비가 내렸다가 날씨가 뒤죽박죽이었다. 아직 고구마를 다 캐지 못했는데 또 비가 내리고 있다. 영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300평 남짓밖에 안 되는 밭에 고구마를 캐는 기간이 일주일 넘게 결렸다.

고구마는 멧돼지가 아주 좋아하는 작물이라 집 앞 밭에 심었다. 이 밭은 마을 안에 있어서 그런지 동물들이 잘 오지 않는다. 덕분에 해마다 무사히 고구마를 수확하고 있다. 마을 길 바로 옆에 밭이 있다 보니 고구마를 캘 때마다 온 마을 사람을 다 만난다. 오늘도 지나던 할머니가 우리 고구마를 보고 말씀하셨다. “아이고, 여는 고구메가 에법 나오네. 참말로 농사 잘 짓다! 우리는 줄기만 무성하게 자라고 밑에 고구메는 몇 알 안 나오드라. 올해는 날씨 때문인가 영 농사가 되는 기 없다. 콩도 지대로 안 여물어가 우짤란가 모르겄다.” 흐린 가을 하늘처럼 할머니 말씀이 쓸쓸하게 들렸다.

우리 마을 할머니뿐 아니라 태풍과 잦은 비 때문에 수확을 못하게 되어 버린 농가가 많다. 그래서 땅 속에서 빠끔 얼굴을 내미는 고구마가 반갑다가, 문득 마음이 캄캄하게 무거워지기도 한다. 흐렸다가 맑았다가 마음도 날씨를 닮았는지 뒤죽박죽이다. 해마다 ‘날씨가 이상하다, 이상하다’했지만 올해는 유난히 이상기후가 크게 느껴진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고구마를 캐면서 ‘이 일을 어쩌나’ 생각하니 자꾸만 코끝이 찡하게 시렸다.

‘농사’라고 묶어서 이야기 하지만 농사에는 여러 가지 농법이 있다. 농부가 어떤 농법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자연을 살릴 수도, 더 망가뜨릴 수도 있다. 처음 농촌에 와서 우리 밭을 빌리기 전에 다른 농가에서 일을 했다. 농사일을 몸에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생활비도 필요했다. 하지만 농사일을 배우기보다 실망이 컸다. ‘농부라고 다 자연을 아끼는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덜컹 했다. 두둑에서 걷어 낸 비닐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밭 구석에 대충 쌓아놓은 비료 포대들이 눈에 걸렸다. 또 벌레를 죽이는 약, 풀이 자라지 않게 하는 약, 작물 크기를 키우는 약, 빛깔을 좋게 하는 약까지 오만가지 농약이 있었다. 그런 약들은 더 빨리 땅을 황폐하게 만든다.

요즘은 ‘스마트 팜’을 시작하는 농가도 늘고 있다. 스마트팜은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인공 지능 기술로 농작물이 자라는 환경을 알맞게 맞추어 관리하는 농장’이다. 스마트 팜에 대해 검색하다 보면 ‘농업 문제를 해결할 4차 산업혁명’이라는 홍보 글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세계 인구는 늘어가고, 농부가 점점 줄어드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스마트 팜이 이상기후에 대한 대책이 될 것이라는 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마트 팜을 보면 농업이 지켜야 할 가치와 더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자연을 대신 하겠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스마트 팜이 가진 좋은 역할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만든 기술로 자연을 대신하겠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 아닐까?

농산물을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맞추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그래서 농사짓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농촌을 제대로 살리려면 농업이 정말로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흙을 만지면서 일을 할 때 ‘나도 자연이구나, 살아 있는 존재구나’ 하고 느낀다. 내가 자연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고, 살아 있는 흙을 지키는 일이 농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을 병들게 하는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 따위를 쓰지 않고, 땅을 살리는 농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그 첫 마음을 잃지 않고, 여섯 해째 농사를 짓고 있다. 어떻게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 내 곁을 지켜 주는 식구들과 농촌에 온 청년을 귀하게 여겨준 이웃 어른들 덕분이다. 이웃 어른들은 자연에 기대어 농사짓는 농부가 무엇을 소중히 지켜야 하는지 삶으로 보여 주시는 분들이다. 그 분들을 만나 더 당당하게 농사지을 수 있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오려는 청년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그 가운데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청년들도 있다. 청년 농부가 늘어나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깊이 고민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손으로 자연을 살릴 수도, 더 망가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땅을 살리고, 지구를 지키려는 청년 농부가 더 많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고구마를 캐면서 왜 그렇게 코끝이 찡했던 걸까? 생각해 보니 농사를 더 이상 짓지 못하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나 보다. 이렇게 위태로운 마음으로 농사를 짓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나 내가 좋아하는 일, 나를 살아 있게 해주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산골 마을에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청년 농부의 꿈이 결코 부질없는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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