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자연을 조금이라도 덜 해치려고 소농으로 살지만, 이렇게 벌어 농사지을 땅을 산다는 건 하늘에 별따기다. 하지만 빌린 논밭에서 농사를 이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밭 저 밭 옮겨 다닐 때마다 몸과 마음에 얼마나 큰 힘이 드는지 모른다. 

ㅣ 김예슬(서와)/청년농부·경남 합천
 

기다리는 비는 오지 않고, 때 아닌 폭염에 작물도 농부도 녹초가 되었다. 호스가 닿지 않는 밭에 물조리개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며 몇 시간씩 물을 주어야 했다. 물주는 일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심어 놓은 작물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물을 준 다음 날, 눈에 보일 만큼 작물이 쑤욱 자랐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반가운 단비가 내렸다. 물조리개를 들고 몇 날 며칠을 동동거려도 비 한 번 내리는 것만 못하다. 지붕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얼마나 좋던지, 창문을 빼꼼히 열어 두고 한참 빗소리를 들었다. 마치 밭에 심긴 고구마, 감자, 콩이 된 것처럼 몸과 마음이 몽글몽글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냉해와 가뭄 거기다 폭염까지. 봄에 씨앗을 뿌리고, 이제 막 여름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올해 농사는 글렀다 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이웃 농부님들은 “이래가 농사짓고 살겠나”라는 말을 부쩍 많이 하신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안에 무거운 돌 하나가 떨어져 쌓인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지속 가능한 삶’이다. 무엇이 내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할까?
삶의 방향을 고민하던 청소년기를 지나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자연스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흙을 만지며 자연에 있을 때, 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가는 내 모습이 있는 그대로 좋았다. 지금도 나에게 왜 농부가 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나를 살아 있게 해 주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서 농부가 되었다고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말이 두리뭉실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의 방향을 정할 만큼 선명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기대어 살아가고 싶었던 자연이 위태롭다. 내가 바라는 삶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농사를 짓고,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렇게 일곱 해가 지났다. 지난 시간 동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애썼다. 곳곳에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며 애쓰는 사람들이 있고, 아직 피부로 느껴질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마을에는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농촌에서 살아온 일곱 해 동안 산과 강을 파헤치는 포클레인을 보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 산을 파헤쳐 만든 이 길이 농촌에서 살아가는 내 삶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할까?

며칠 전,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농사지어서 돈이 돼?” 친구 말에 나는 “큰돈은 안 되지. 그런데 농사로 너무 큰돈을 벌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내 삶을 이어갈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해”라고 대답했다. “말이야 쉽지. 농사지을 땅 사면서 빌린 돈 어떻게 다 갚으려고?” 친구 질문에 잠시 뜸을 들였다. “고민하고 있어. 그래도 농사로 돈을 벌려고 하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걸 잃을 것 같아.”

땅을 사면서 빌린 돈을 갚으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구조 속에서 농사로 돈을 벌려고 하면, 내가 바라는 삶과는 점점 멀어진다. 그럼 농사지을 땅을 사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가족들과 1000평이 조금 넘는 밭에서 농사짓고 있다. 비닐이나 화학비료, 제초제 같이 자연을 망가뜨리는 것은 쓰지 않으려고 애쓴다. 친구 말처럼 이렇게 농사지어선 돈이 안 된다. 자연을 조금이라도 덜 해치려고 소농으로 살지만, 이렇게 벌어 농사지을 땅을 산다는 건 하늘에 별따기다. 하지만 빌린 논밭에서 농사를 이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밭 저 밭 옮겨 다닐 때마다 몸과 마음에 얼마나 큰 힘이 드는지 모른다.

농사법을 바꾸지 않고는 농사를 늘릴 수도 없다. 내 몸도 지속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노동은 몸을 망가뜨린다. 태어나 처음으로 허리가 아팠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오 분을 앉아 있기 어려웠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때부터 저녁마다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 지속가능한 삶에 무엇보다 몸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풀이 나지 않도록 덮는 부직포와 제초포를 쓰는 이유도 그렇다. 부직포와 제초포는 한 해 쓰고 버려지는 비닐보다 몇 해를 더 쓰지만, 결국에는 쓰레기가 된다. 마음 같아서는 부직포와 제초포도 쓰지 않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것은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다.

‘지속가능하다’라는 말 안에 많은 의미가 담긴다. 여러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문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계속 고민해야 한다. 산골 마을에 끝없이 이어지는 공사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파헤쳐 사람을 위한 무언가를 만들 때는 그것이, 그 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어야 하고, 삶을 나아지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되도록 자연을 덜 해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오래 기다리던 단비가 내리는 오늘처럼. 오랜 시간 이어온 이 고민 끝에도, 보드랍고 촉촉한 단비가 내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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